한국 드라마 이야기/무신(武神)

무신(武神), 팜므파탈 송이가 노예 김준을 구해준 이유

Shain 2012. 2. 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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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영중인 '빛과 그림자'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시대극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남자 주인공의 험난한 인생을 그리다 보면 그의 사랑을 받는 여성은 수동적으로 운명에 휩쓸리는 캐릭터가 되곤 합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가는 여성은 상대적으로 '악녀'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여성과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감수하는 독한 여자의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드라마도 많습니다.

주말 드라마 무신(武神)은 첫부분부터 끔찍한 고문장면과 노예들에게 가해진 수치스러운 노출, 폭력으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버마의 샤프란혁명에서도 알 수 있듯 '국교(國敎)'를 가진 나라에서 종교인들에게 핍박이 가해지는 건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정치적 부작용을 염려해 정치인들이 꺼리는 일 중 하나 종교 탄압입니다. 잔혹한 고문장면은 무신정권의 빗나간 권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문을 즐기는 군인들의 가학성, 승려들까지 가차없이 피흘리게 하는 힘, '무(武)'의 방향이 잘못 흐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추국장에서 김준을 구해낸 송이, 모진 고통을 겪는 월아.

이 드라마의 제목은 무신(武臣)이 아닌 무신(武神)입니다. 치열한 갈등 끝에 정권을 잡았던 무인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그 중 탁월했던 한 무인 김준(김주혁)이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남자 주인공에게 순수하고 여린 월아(홍아름)는 평생 마음에 담아둘 영원한 사랑이자 거친 운명에 휩쓸려 떠내려간 가녀린 꽃입니다. 반면 김준을 얻기 위해 서성이는 송이(김규리)는 김준에게 정치적 동지는 될 수 있어도 사랑이 되기는 힘든 여성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악녀'의 수순을 밟아갈 것입니다.

시놉시스를 보니 월아는 김준과의 혼인을 앞두고 죽게될 운명이라는데 이것은 공역장으로 옮겨진 김준이 격구로 성공해 최우(정보석)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월아를 자살하게 할 사람이 과연 송이가 될까요 그도 아니면 송이의 배다른 오빠들인 최항(만전, 백도빈) 형제가 될까요. 월아의 죽음은 이후 무신정권을 휘두르게 될 최씨가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최항은 최우의 후계자가 될 인물이고 송이는 원종의 외할머니가 될 사람이니 김준이 권력자인 그들에게 원한을 갖는다면 그건 월아 때문이겠죠. 연약한 연인이자 나아가 고통스레 삶을 이어가는 백성, 월아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팜므파탈 송이

절벽에 핀 꽃을 따다줄 정도로 사랑한 월아. 난장(도수희)에게 온몸이 빨갛게 되도록 얻어맞으며 부엌내기로 고생하는 월아가 고생할수록 김준의 마음은 더욱 아플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이름으로 수법(강신일)스님과 수행했지만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닦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기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은 세상에 흔하지 않습니다. 배우 홍아름을 주연급으로 발탁한 것을 보면 '월아'가 죽으면 그와 닮은 또다른 여성이 나타나 김준을 흔들어놓을 거 같단 생각도 듭니다.

고려는 아시다시피 여권이 조선대보다 보장되던 시기라고 합니다. 딸도 균등하게 재산을 분배받고 제사를 모시는가 하면 족보에도 아들 딸 가리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가 되었습니다. 재혼도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하니 조선 시대 보다는 분명 자유분방한 여성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런 '평등'이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오른다거나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수준은 아니라는게 약점이죠. 극중 송이가 제 아무리 최우의 딸이라도 운신의 폭은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 못지 않은 배포를 가진 최우의 딸 송이

극중에서는 최우의 딸 최씨를 송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송이의 어머니는 정숙첨의 딸 정씨(김서라)입니다. 최우에게는서자들이 있었지만 천한 기생의 소생이라 신분의 약점이 있다 판단, 적녀 최씨와 그의 남편이 될 김약선(이주현)을 후계자로 키우려 했습니다. 서자인 오빠들의 기량이 뛰어났다면 사회적 활동이 미약한 최씨를 밀어낼 수도 있었겠지만 김약선이 뛰어나 그랬는지 아니면 최씨 역시 만만치 않은 정치적 역량을 갖춘 여자라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면 최우가 자신의 딸을 너무도 예뻐한 까닭인지 딸과 사위를 전폭적으로 밀어준 것같습니다.

극중 송이도 김준이 고문받는 추국장에서 숙부 최향(정성모)을 상대하며 웬만한 남자를 뛰어넘는 배포를 보여줍니다. 최충헌(주현)은 이미 늙어 주변에서 김덕명(안병경)같은 간신들이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규보(천호진)와 장기나 두며 자신이 눈뜬 장님임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같진 않습니다. 최우 보다 벼슬이 높은 동생 최향은 자신을 지지하는 간신들과 결탁해 이장용(이석준)의 조언대로 최우를 위협하는 상황입니다. 최충헌이 두 아들 중 누구에게 권력을 물려주느냐에 세상의 눈이 쏠려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최충헌, 최우의 자리를 노리는 최향.

송이는 승려인 김준이 매를 맞고 피를 흘리자 손수건으로 친히 닦아주고 아버지를 상대할 때도 애교섞인 말투로 마치 교태를 부리듯합니다. 숙부 최항에게 노비 김준을 살려달라 할 때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김준을 살려달라 청하는 송이는 김준이 할아버지의 재물인 노예였으니 당연히 장자인 아버지의 재물이라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최충헌의 재산은 숙부의 것이 아니라 장남인 내 아버지의 것이니 내 노예를 살려달라 유세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최향에게 아버지의 권력을 넘보지 말라 은근히 압박하는 수작이기도 합니다.

최향은 이 앙큼한 권력 다툼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조카의 청을 눌러보지만 형인 최우까지 눈치껏 딸의 편을 들자 어쩔 수 없이 김준을 살려주기로 합니다. 송이가 김준에게 눈도장을 찍은 건 사실이라도 그들에게 김준의 목숨이나 인정같은 건 아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김준은 형제 간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형의 장인인 정숙첨의 목숨까지 노리며 승려들의 반란을 조작한 최향에게 장자의 권리를 들어 김준을 살려달라 청한 송이는 아들이었다면 아버지 최우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었을 것입니다.

도도한 그녀가 갖지 못할 단 하나의 존재.

만전과 만종(김혁)이 최우의 서자로 기생집에서 흥청망청 술이나 퍼먹는 것과 달리 송이는 부모들과 대화를 나누며 고려의 정국을 이야기합니다. 최충헌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난하는 송이는 당돌하게도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었다 합니다. 나아가서 마음에 맞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소망까지 피력합니다. 그런 송이의 배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최우와 달리 어머니 정씨는 '대가 너무 쎄다'며 걱정합니다. 야망을 품은 한 여인이 그런 시대를 호령하자면 '팜므파탈'의 운명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말투에 담겨진 욕망, 따뜻하고 순수한 듯하지만 송이는 역사와 함께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여인이 아닙니다. 누굴 대하든 교태섞인 말투로 자신을 따르게 하는 이 여인은 최근 드라마에서 흔히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타입의 악녀가 될 듯합니다. 김규리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거칠고 직선적인 남성사극 속에서 유일하게 곡선의 미를 보여주는 그녀는 정말 탁월한 '캐릭터' 아닌가 싶습니다. 최우에 딸 최씨에 대한 기록이 '비극'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끝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는 여인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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