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무신(武神)

무신(武神), 절벽을 기어오르는 범의 새끼가 되기 위해

Shain 2012. 2. 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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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극은 배우들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려운 장르가 맞나 봅니다. 현대극에서는 분위기있게 자기 역을 잘 소화하던 배우도 사극에 출연하면 발성이 좋지 않다는 약점이 드러나곤 합니다. 반면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한 조연처럼 보이던 배우가 사극에서는 과감한 액션이나 안정적인 호흡을 보여주며 주목받기도 합니다. 이런 '전문배우'들이 모자라 스케일이 큰 사극을 찍을 때 마다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죠. 사극 특유의 과장된 표현과 큰 목소리가 거슬리긴 하지만 이런 역할은 연기를 오래한 배우가 아니면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정호빈이나 정성모같은 배우들이 사극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마치 물만난 물고기같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개인사정으로 오래 TV에서 볼 수 없었던 정숙첨 역의 정욱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사극에 출연한 배우 주현 역시 캐릭터에 알맞은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이미 기력이 쇠해 두 아들의 권력다툼을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김덕명(안병경)이 눈과 귀를 막고 둘째 아들 최향(정성모)가 형 최우(정보석)의 날개를 꺾기 위해 사건을 조작해도 모르는 척 사건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만 있습니다. 오래 권력을 휘두른 능구렁이답게 모든 걸 다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호랑이가 갓 낳은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듯 자식들에게 절벽을 기어올라오라 명합니다.

최충헌에게 무릎꿇고 빌어 장인 정숙첨을 살린 최우.

도방을 맡은 추밀원부사 최우에게 절벽을 기어올라오라한 것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최우의 주변을 채운 많은 인물들을 활용해 네 스스로 권력을 쥐란 뜻이고 권력을 탐내는 네 동생 최향을 네가 제거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향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하면서도 이규보(천호진)와 김약선(이주현)같은 최우의 세력들을 가까이 두는 최충헌(주현)은 차기 권력자가 되려면 모종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또 안정된 권력을 얻기 위해선 반대파를 조율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도 물론입니다. 그 모든 힘은 최우 스스로 얻어야하는 것입니다.

정숙첨은 최우에게 장인이기도 하지만 거란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공신이고 최우의 정치적 날개가 되어줄 인물입니다. 천기 서련방에게 얻은 망나니 아들 만전(백도빈)과 만종(김혁), 딸 송이(김규리)외에는 적당한 후계자도 없는 최우에게 혈족은 누구 보다 중요한 정치적 발판입니다. 최우는 정숙첨을 살리기 위해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 최충헌에게 엎드려 빌었습니다. 권력자의 수치일 수도 있겠으나 절벽을 기어올라 살아남는 호랑이가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김준(김주혁) 역시 승려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격구장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살아남는 최후의 새끼 호랑이가 되기 위해 그들이 움직입니다.



격구장에서 살아남은 노예 출신의 장수들

김준에게 딱히 특별한 감정이 없던 송이가 최향에게 김준을 살려달라 청한 건 아버지가 정당한 최충헌의 후계자임을 어필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재산이면 아버지와 나의 노예인데 왜 숙부가 죽이느냐는 뜻의 대담한 항의였던 것이죠. 고려의 가장 큰 볼거리라는 격구 게임 역시 최우와 최향의 힘싸움같은 성격이 짙었습니다. 드라마 '무신'은 마치 로마시대의 노예들이 목숨걸고 싸우는 전투가 볼거리였듯 격구 역시 스포츠가 아닌 목숨건 대결로 설정했습니다. 장수를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니 그럴 법도 하지만 생각 보다 많이 잔인하더군요.

남성사극의 특징 중 하나는 '과장'입니다. 권력자의 딸인 송이가 자신의 야망이나 정치적 능력을 감추기 위해 오버스럽게 상냥함을 가장하고 교태를 부리듯 등장하는 남성 영웅들의 성격 역시 과격함을 과도하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역장에서 시체나 치우고 살던 김준이 입지전적인 인물로 성공하자면 격구같은 위험하고 힘든 장애물이 존재해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살생을 금하는 승려로 자란 김준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기로 마음먹습니다. 월아(홍아름)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일단은 절벽을 기어올라야 합니다.

김준의 격구 참여를 만류하는 송이와 월아.

노예들을 지휘하던 소군장 최양백(박상민)도 그렇지만 송길유(정호빈)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공주(박상욱)도 노예출신의 장수들입니다. 그들 역시 거친 격구장에서 살아남아 최우와 함께 하는 군사들이 되었고 노예들 사이에서는 성공의 상징이자 신분 상승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인물들입니다. 실제로도 이공주, 최양백 등은 김준과 함께 권력을 도모하는 장군이 됩니다. 춥고 배고프고 고된 노예 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은데 성공까지 거머쥘 수 있다니 김준이 희망으로 삼을 만 합니다.

그러나 수법(강신일)스님과 함께 살며 금강스님 김윤후(박해수)에게 무술을 배우던 김준, 사하촌 사람들 밖에 모르던 그에게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격구 현장은 평생의 신념을 모두 깨트려야만 넘을 수 있는 높은 산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려도 모자랄 판에 사람을 죽여야 하다니 아무리 더 이상 승려가 아니라지만 동료가 목이 잘려 죽는 모습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겠죠. 몇몇 시청자들은 김준의 격구 장면을 이번주에 보여주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출했지만 '살생'을 결심하는 김준의 모습은 꼼꼼히 묘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노예 출신으로 성공한 최양백과 이공주.

승려로 지내며 사람들의 안전 만을 바라던 김준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위험한 호랑이로 살기로 한 건 가치관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격구는 너무도 위험한 게임입니다. 아차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처음 공역장으로 가 죽어버린 시신의 옷가지를 주워입던 때처럼 시레기 몇개 떠 있지 않은 멀건 죽을 먹으면서도 생명을 이어가야했던 것처럼 즉각적인 본능으로 살생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김준은 격구장에서 죽고 죽이는 '무(武)'의 의미를 깨달아야하만 합니다.

추밀원부사 김준, 무신정권 최정점에 올랐던 노예 출신의 김준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멉니다. 무력의 정점을 향해 기어오르는 수많은 호랑이들이 그의 곁을 스쳐지나갈 것입니다. 거란과 몽고를 막아내야 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 방탕한 권력자의 천출로 한때는 승려로 지내다 권력자가 된 최항, 같은 노예 출신으로 김준의 라이벌이 될 것이라는 최양백 등. 힘을 쥔 자의 고뇌와 고통을 한몸에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장용(이석준)같은 책사들, 대집성(노영국)같은 권신들이 그들의 주변을 떠돌다 사라지겠지요.

격구장의 살기를 몸소 보고 느끼게 된 김준. 웅크린 호랑이가 될 것인가.

격구는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김준의 험난한 인생을 예고하는 예고편 같은 것이라 봅니다. 지독한 최양백의 훈련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격구에 참여하게 된 노예 김준을 보며 '반드시 살아남으라' 명하는 송이의 시선이 의미심장하더군요. 드디어 나와 배포가 비슷한 남자를 만났단 뜻임과 동시에 김준의 인물됨을 알아본 송이와 눈물젖은 눈으로 격구에 나가지 말라며 만류하는 월아의 성격이 대비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도약을 꿈꾸는 또다른 호랑이 송이와 소박한 사랑을 꿈꾸는 월아, 김준과의 삼각관계가 흥미롭습니다.

그건 그렇고 격구장으로 향하던 최우의 부인 정씨(김서라)는 왜 월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을까요. 마치 어디에서 본 얼굴같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극중에서는 분명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후에 김준을 아랫사람으로 두게 된 최우가 김준에게 자신의 첩을 아내를 준다고 하던데 혹시 그 첩과 월아 두 사람이 닮은 것은 아닐까요. 분명 월아는 결혼 전날 죽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월아가 혹시 1인 2역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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