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빛과그림자, 70년대 대마초 파동과 함께 무너진 강기태와 가요계

Shain 2012. 2. 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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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왜 그렇게 깡패들이 많았을까요. 많다 못해 패를 이뤄 경쟁할 정도였으니 주먹들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폭력배들이 그리 많으니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강기태(안재욱)가 걸핏하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이유를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부유한 도시로 가난한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도시로 이주해서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거리를 떠돌거나 체력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거친 일에 종사하다 무리를 이뤄 '갱(Gang)'이 됩니다. 주먹으로 빈민가를 장악하는 크고 작은 패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계, 유대인계, 아일랜드계 이주 노동자들 중심으로 전쟁을 벌인 미국 갱들은 아주 유명합니다. 미드 보드워크 엠파이어(Boardwalk Empire, 2010)에서 보았듯 갱들은 금주법이 시행되자 비밀리에 술을 유통시키며 돈을 벌어들이고 그 과정에서 갈등합니다. 또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1961)에서 갈등한 두 폭력 조직은 뉴욕 빈민가의 이탈리아계, 푸에르토리코 출신 갱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빈곤해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생겨 거리를 장악하며 무력을 휘두른 지방 출신 깡패들이 늘어났습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강기태는 사진 앞에서 오열한다.

사람들이 조폭들을 욕하면서도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법이 아닌 무력으로 사람들을 장악하는 그 시대를 가끔 향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시대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도 어려운 시대에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과거의 일부이니 말입니다. 또 나쁜 놈들을 법으로 처단하느냐 질질 끄는 것 보다 직접 주먹으로 응징하는게 훨씬 속 시원하긴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 손으로 복수하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쯤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강기태가 아버지의 원수 조명국(이종원)을 두들켜 패는 모습은 속이 뻥 뚫린다기 보다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믿고 사랑했던, 친형처럼 가까이 지낸 조명국이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모두 빼돌렸다는 사실은 평생이 가도 치유하기 힘든 상처입니다. 아무리 때려도 아버지는 살아돌아오지 않고 한번 잃어버린 의리와 신뢰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원래 나쁜 놈인 장철환(전광렬) 보다 차수혁(이필모)과 조명국의 배신이 더 쓰라린 기태. 심정적으로 무너진 기태에게 대마초 파동이란 또다른 시련이 닥칩니다. 대마초 단속은 기태 뿐만이 아닌 대중문화의 몰락을 뜻하는 거였죠.



의상 경쟁 벌이던 여배우 보다 가요계에 큰 타격

최성원(이세창)이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는 모습은 배우 신성일이 한때 메가폰을 들었단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성원이 직접 찍고 출연한 영화가 '별들의 고향(1974)'과 '겨울여자(1977)'의 패러디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신성일은 '연애교실(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같은 영화를 감독했습니다. 동시에 배우로서 당대 최고 여배우라는 남정임, 문희, 윤정희와 한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결혼교실(1970)'입니다. 최고의 탑스타가 한 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무엇 보다 눈길을 끈 것은 세 여배우의 경쟁입니다.

극중 정혜(남상미)와 유채영(손담비)이 대본과 의상을 놓고 경쟁하듯 그 세 사람의 신경전도 치열했습니다. 감독은 여배우들에게 출연 비중이 수정된 시나리오로 접근해 각자 허락을 받아냅니다. 나머지 두 여배우 보다 출연 분량이 많고 주연급이라고 생각한 배우들은 촬영에 임했지만 현장에서도 눈치싸움은 계속됩니다. 포스터에 출연순서를 적는데도 가나다순으로 건배를 하는 장면은 나이순으로 등 배우들을 신경써야 했습니다. 결국 세 여배우는 영화를 찍고 난 후 경쟁적으로 의상을 맞추느냐 출연료가 남지 않았다며 백만원을 출연료로 주기전엔 함께 출연하지 말자고 했다는군요(50만원이 출연료).

신성일, 남정임, 문희, 윤정희가 함께 출연한 영화 결혼교실. 엄앵란도 특별출연했다.

외화 쿼터를 위한 의무 제작 때문에 다소 상황이 좋지 않긴 했으나 70년대 한국영화는 양적으로 발전합니다. 영화계는 대마초 파동으로 풍비박산난 가요계에 비하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가요계는 줄줄이 엮여 들어가 단속 이후 활동 중인 중견가수가 7, 8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극중 홍수봉(손진영)이 고문받던 모습은 당시 남산으로 끌려간 신중현이나 조용필의 증언을 떠오르게 하는데 검거된 사람들은 고문을 받으며 같이 흡연한 사람들을 대라 강요당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가로 끌려갔습니다.

요즘은 모발검사나 소변검사로 흡연 여부를 가려내지만 당시는 비밀 투서와 자백으로 검거된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린 기사를 읽어보면 조용필은 골초라도 대마초 알러지 반응을 보인 타입으로 69년 미군부대 가수로 있을 때 4회 가량 흡연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휴우증을 보여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69년은 대마초 단속법인 '습관성의약품관리법'이 제정되기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백 만으로 단속되어 출연정지를 당했으니 억울할 법도 합니다. 극중에서는 노상택(안길강)이 명단을 제공하고 이정자(나르샤)의 매니저가 음모를 꾸민 것으로 처리했죠.

강기태를 대마초 공급책과 조직 폭력배 배후로 엮기 위한 음모.

70년대에 대마초의 위해성을 단정하고 단속을 실시한 것은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들여온 것으로 왜 해로운 것이냐던가 어떤식으로 계몽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가수들은 미군부대 무대에 자주 올랐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다 자연스럽게 즐기게 되고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많았죠. 소주 한잔 마시듯이 담배 한대 피우듯 흡연하다 단속되었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마초 파동을 두고 범죄 단속이라기 보다 정권의 정당성을 역설하기 위한 사회 분위기 환기 차원의 성과성 처벌이라 평가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지금도 일부 신문기사에서 담당 검사가 '대마초 흡연자 명단'을 입수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명이 넘는 가수들을 잡아가둔 방법이 투서와 자백, 고발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해당 가수들이 겪어야했던 오랜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닐지도 모릅니다. 79년 이후 연예계는 퇴출당한 가수들을 구제하기 위해 옹호 분위기를 조성하긴 했지만 그 '위대한' 조용필도 80년대 초까지 움추렸고 김추자를 키우며 한국 락의 대부가 된 신중현은 가요계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보며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정권의 미움을 받은 신중현이 단속의 타겟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비흡연자인 유채영까지 엮여들어가게 된 상황.

금지곡과 출연금지된 가수들이 왜 그리 많은지 방송가와 라디오 방송은 틀 노래가 없어서 고민하고 가요 프로그램과 쇼무대에는 출연시킬 가수가 없다며 호소했다니 대마초 파동을 한국 가요계의 발전이 중단된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할만 합니다. 이장희를 비롯한 포크송 가수들은 그 이후로 거의 볼 수가 없었던 것같군요. 한편 극중 한지평(문태원)이 끌려간 것처럼 같은 시기에 폭력배 단속도 절정을 이루었는데 78년 기사 중에는 일부 조직 폭력배 두목에게 사형이 구형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마초 파동과 폭력배 배후 혐의로 끌려갈 강기태에게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70년대 후반의 사회 분위기와 연예계 위기를 강기태와 극적으로 접목시킨 것도 대단하지만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안재욱의 연기도 상당히 볼만합니다. 그리고 여배우 김지미와 윤정희의 자존심 싸움을 연상시키는 유채영과 정혜의 갈등도 흥미롭구요. 그러고 보면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 힘든 유명 배우 커플들의 스캔들이 한번쯤 얽혀도 좋을 거 같긴 한데 딱히 알맞은 배우가 없군요. 오뚜기같은 사나이 강기태가 이번에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다음주의 반전을 기대해 봅니다.

빛나라와 가요계의 몰락. 쉽게 감당하기 힘든 강기태의 위기.


* 유채영과 강명희가 만났던 카페의 음악은 영화 '써머타임킬러(The Summertime Killer, 1972)의 OST인 'Run And Run'입니다. 어린 시절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청년이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올리비아 핫세 주연입니다. 비운의 사랑을 하게 되는 멋스러운 남자주인공 역할은 크리스 미첨이 맡았습니다.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그린 내용답게 고독한 느낌을 주는 금발의 킬러 크리스 미첨과 청순함의 대명사였던 올리비아 핫세가 잘 어울린 멋진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 허술한 영화로 평가됩니다.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사람은 음악으로 시를 쓰는 듯한 서정성을 선보인 루이스 바칼로프(Luis Bacalov)로 영화음악도 유명하지만 뉴트롤스의 명반 '아다지오'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는 Country Lovers가 불렀습니다.

* 정혜와 양동철이 다방에서 듣던 노래는 윤연선의 '얼굴'입니다.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고 많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부르던 이 노래는 신귀복이라는 음악교사와 심봉석이라는 생물교사가 1967년 창작한 노래입니다. 직원회의 시간에 교장의 말이 길어지자 동그라미를 그리며 낙서하는 심교사를 보고 악상이 떠올라 바로 시를 짓고 작곡했다고 하는군요. 포크송 가수 윤연선은 1972년 데뷰해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이 노래 원작자 신귀복 교사에게 허락을 받은 뒤 1974년 녹음합니다. 70년대 후반에 은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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