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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은 잡지 중 영화 촬영 에피소드를 회상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60년대 영화는 발전된 문화의 상징이었고 화려한 배우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 글은 대중의 사랑을 받던 은막 스타가 사실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험담이었는데 그 내용이 참 재미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출신인 한 여배우가 지방 촬영 중 갑자기 배추뿌리가 먹고 싶으니 구해오라며 힘없는 조연출을 압박했다 것입니다. 배곯던 시절 맛있게 먹던 배추뿌리를 먹고 싶은 욕구야 이해한다 쳐도 눈오는 한밤에 어딜 가서 구해오란 것인지 밖으로 나가면서도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더랍니다.
여배우 비위 맞추는 일에 빈정이 상한 조연출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마침 그들이 촬영 중이던 영화에는 주연 여배우가 눈밭을 헤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조연출은 단단히 무장하고 촬영해도 힘든 그 장면을 달랑 한복 한벌에 고무신을 신고 연기하도록 준비했답니다. 여배우는 그 장면을 촬영하기 싫다고 투털거렸지만 영화는 영화, 결국 그 추운 날 속옷도 제대로 못 입고 눈밭을 굴러야 했습니다. 배추뿌리 구해오라 심술부리던 성격과 달리 영화에는 진지했던 그녀는 온몸이 빨갛게 부어오르면서도 열심히 그 장면을 촬영해 명장면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20여년전 잡지에 실린 글이라 내용도 불분명하지만 한가지 기억에 남았던 것은 화려한 여배우의 '촌스러운' 욕구였습니다. 인기 연예인이라고 해서 그 생활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 여배우가 그토록 먹고 싶어한 '배추뿌리'는 먹을 것 없어 무엇이던 다 먹던 시절의 상징입니다. 가난한 시대의 상징 배추뿌리와 인기 여배우라니 어지러웠던 그 시대 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이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보여주는 70년대가 딱 그렇습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심야 통행 금지를 실시했는데 정치권의 질서는 양아치들의 힘싸움과 별로 다를게 없고 화려한 연예계 주변엔 파리떼같은 조폭들이 힘자랑을 합니다. 더 웃긴 것은 그들의 관계가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정의롭고 올곧은 강기태(안재욱)라도 주먹의 힘 없이는 조태수(김뢰하)를 떨쳐낼 수 없으며 한지평(문태원)같은 조폭들의 도움 없이는 쇼단 무대도 따낼 수 없습니다. 궁정동의 권력은 이해하면서도 이정혜(남상미)는 용서가 안되는 그 시대의 풍경도 그렇습니다.
궁정동 연회장에서 '승은'을 입고 승승장구한 여자 연예인들은 누굴까. 혹은 은혜를 입지 않고 시중만 들다 나온 사람들은 누굴까.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가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닌 이상 그걸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 시절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고백이나 당시 그들을 봤다는 목격담을 듣고 짐작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흥미로운 건 '빛과 그림자'의 유채영(손담비)처럼 궁정동 연회를 자원하고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잘 사는 연예인이 있는가 하면 이정혜처럼 도망나오거나 노래만 부르고 왔는데도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예계에 호의적이던 기태어머니 박경자(박원숙)가 이정혜 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그 시대는 소문에 관대하지 못했습니다. 서슬퍼런 권력자에게는 아무말도 못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등에 엎은 연예인들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칠공자 사건이 터졌을 때도 돈많은 재벌 자식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못해도 같이 어울린 여자 연예인들은 자살을 시도하고 은퇴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돈과 권력 앞에 무력한 국민들이 만만하게 공격할 수 있는 건 연예인들 밖에 없었죠. 물론 스스로 그 돈과 권력의 힘을 원한 사람들도 있기에 떳떳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궁정동에 다녀오고도 대선배로 추앙받는 사람이 있다는데 일부 여자연예인들은 '어르신의 여자'란 누명 때문에 결혼하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루머의 약점은 때로는 정확하지만 때로는 뜬구름처럼 허황된 말이라 엉뚱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입니다. 외국 국빈 접대설 나아가 흑인 아이 출산설로 은퇴해야했던 '정소녀' 케이스가 대표적입니다. 극중 이정자(나르샤)처럼 매니저와 염문이 퍼진 건 그나마 행운입니다.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책임지는게 맞지만 이정혜처럼 억울한 여배우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정치권에서도 민심을 홀리기 가장 알맞은 소재가 연예인 스캔들이었습니다. 장철환(전광렬)의 재기를 꿈꾸며 강기태를 공격하려는 차수혁(이필모) 역시 '대마초 단속'이란 카드를 꺼냅니다. 노상택(안길강)은 가수들 중 누가 대마초를 피우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고 차수혁은 강기태를 위기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실제 대마초 단속은 70년 이전에는 실시된 적없지만 70년대 후반엔 사회 기강 확립 차원에서 강력한 단속이 실시됩니다. 정부는 대마초 소지자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76년엔 대마초 흡연 혐의로 가수, 배우들이 다수 검거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대마초를 위험하게 여기고 쉽게 접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지만 60년대에 유입된 대마초는 마약이란 인식이 없던 때입니다. 그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던 사람들이니 일반인이든 연예인이든 검거하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숫자를 불릴 수 있었습니다. 연예인들을 단속하면 연예인들의 타락과 방탕한 생활을 지적하면 되고 일반인들이 검거되면 사회가 이 정도까지 혼란스러운 줄은 몰랐다며 경계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대마초 단속은 그때의 정권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해당 연예인들에게는 영구 출연금지같은 치명적인 타격이 있었죠.
깡패와 주먹들의 힘을 묵인하는 사회이면서 조폭을 단속하고 대마초 피우는 사람이 많지만 검거하고 연예인들을 궁정동에 부르면서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사회의 이중성. 70년대를 과도기라 하는 건 그런 혼란이 공존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쇼비지니스 업자로서 '밤의 황제'가 되는 강기태가 처한 어려움이 바로 그것일 테구요. 송미진(이휘향) 사장의 자본과 격려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강기태가 남산 김부장(김병기)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을까요? 조명국(이종원)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불가근불가원해야할 것입니다.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면 안되기에 강기태의 모델이 된 그 사람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연예계의 대부라 불린 최모씨는 김태촌같은 거물 깡패를 후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주류업자들과의 갈등 때문에 큰 스캔들을 일켜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가수였던 아내의 존재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극중 홍수봉(손진영)을 성공시킨 것처럼 최씨에게 인정받으면 대성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춘화, 이주일, 조용필같은 대스타들이 그와 함께 성장하고 성공한 연예인들입니다.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권력자, 주먹들과 공생해야했을까. 아니면 연예계가 원래 그런 곳일까 생각해볼 일입니다.
아무튼 이정혜는 70년대, 억울하게 소문의 희생양이 되어야했던 여배우들을 모델로 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은막에서 은퇴하고 영원히 연예계를 떠나야했던 그녀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고 소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보낸 채 결혼하지 못한 여배우일 수도 있겠고 하여튼 강기태의 짝이 되진 못할거라 봅니다. 또 시대극에서 최완규 작가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연출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주인공의 역할은 주인공의 그리움을 독차지하는 '미망(未忘)'에 그치는 경우가 많죠. 이전 기사를 보니 정혜의 부모님은 좌익 출신이라는 설정이라던데 그렇다면 더욱 힘들지 않을까요.
여배우 비위 맞추는 일에 빈정이 상한 조연출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마침 그들이 촬영 중이던 영화에는 주연 여배우가 눈밭을 헤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조연출은 단단히 무장하고 촬영해도 힘든 그 장면을 달랑 한복 한벌에 고무신을 신고 연기하도록 준비했답니다. 여배우는 그 장면을 촬영하기 싫다고 투털거렸지만 영화는 영화, 결국 그 추운 날 속옷도 제대로 못 입고 눈밭을 굴러야 했습니다. 배추뿌리 구해오라 심술부리던 성격과 달리 영화에는 진지했던 그녀는 온몸이 빨갛게 부어오르면서도 열심히 그 장면을 촬영해 명장면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화려한 스타들 뒤에 공생하는 불편한 진실들.
이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보여주는 70년대가 딱 그렇습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심야 통행 금지를 실시했는데 정치권의 질서는 양아치들의 힘싸움과 별로 다를게 없고 화려한 연예계 주변엔 파리떼같은 조폭들이 힘자랑을 합니다. 더 웃긴 것은 그들의 관계가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정의롭고 올곧은 강기태(안재욱)라도 주먹의 힘 없이는 조태수(김뢰하)를 떨쳐낼 수 없으며 한지평(문태원)같은 조폭들의 도움 없이는 쇼단 무대도 따낼 수 없습니다. 궁정동의 권력은 이해하면서도 이정혜(남상미)는 용서가 안되는 그 시대의 풍경도 그렇습니다.
70년대 대마초 파동, 소문의 희생양이 된 연예인들
궁정동 연회장에서 '승은'을 입고 승승장구한 여자 연예인들은 누굴까. 혹은 은혜를 입지 않고 시중만 들다 나온 사람들은 누굴까.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가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닌 이상 그걸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 시절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고백이나 당시 그들을 봤다는 목격담을 듣고 짐작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흥미로운 건 '빛과 그림자'의 유채영(손담비)처럼 궁정동 연회를 자원하고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잘 사는 연예인이 있는가 하면 이정혜처럼 도망나오거나 노래만 부르고 왔는데도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예계에 호의적이던 기태어머니 박경자(박원숙)가 이정혜 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그 시대는 소문에 관대하지 못했습니다. 서슬퍼런 권력자에게는 아무말도 못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등에 엎은 연예인들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칠공자 사건이 터졌을 때도 돈많은 재벌 자식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못해도 같이 어울린 여자 연예인들은 자살을 시도하고 은퇴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돈과 권력 앞에 무력한 국민들이 만만하게 공격할 수 있는 건 연예인들 밖에 없었죠. 물론 스스로 그 돈과 권력의 힘을 원한 사람들도 있기에 떳떳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누가 궁정동에서 시중들던 사람인지 알 방법이 없다.
정치권에서도 민심을 홀리기 가장 알맞은 소재가 연예인 스캔들이었습니다. 장철환(전광렬)의 재기를 꿈꾸며 강기태를 공격하려는 차수혁(이필모) 역시 '대마초 단속'이란 카드를 꺼냅니다. 노상택(안길강)은 가수들 중 누가 대마초를 피우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고 차수혁은 강기태를 위기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실제 대마초 단속은 70년 이전에는 실시된 적없지만 70년대 후반엔 사회 기강 확립 차원에서 강력한 단속이 실시됩니다. 정부는 대마초 소지자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76년엔 대마초 흡연 혐의로 가수, 배우들이 다수 검거되었습니다.
대마초 단속으로 강기태를 위기에 몰아넣으려는 장철환과 차수혁.
깡패와 주먹들의 힘을 묵인하는 사회이면서 조폭을 단속하고 대마초 피우는 사람이 많지만 검거하고 연예인들을 궁정동에 부르면서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사회의 이중성. 70년대를 과도기라 하는 건 그런 혼란이 공존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쇼비지니스 업자로서 '밤의 황제'가 되는 강기태가 처한 어려움이 바로 그것일 테구요. 송미진(이휘향) 사장의 자본과 격려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강기태가 남산 김부장(김병기)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을까요? 조명국(이종원)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불가근불가원해야할 것입니다.
간신히 조태수라는 산을 넘었는데 정혜와의 사랑은 가능할까.
아무튼 이정혜는 70년대, 억울하게 소문의 희생양이 되어야했던 여배우들을 모델로 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레 은막에서 은퇴하고 영원히 연예계를 떠나야했던 그녀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고 소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보낸 채 결혼하지 못한 여배우일 수도 있겠고 하여튼 강기태의 짝이 되진 못할거라 봅니다. 또 시대극에서 최완규 작가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연출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주인공의 역할은 주인공의 그리움을 독차지하는 '미망(未忘)'에 그치는 경우가 많죠. 이전 기사를 보니 정혜의 부모님은 좌익 출신이라는 설정이라던데 그렇다면 더욱 힘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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