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많이 쓰는 표현 중에 '까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 '여자친구에게 까이다' 내지는 '학교 일진에게 까이다', 또는 '동생에게 까이다'란 식으로 많이 쓰는데 이성에게 차였다, 폭력배들에게 맞고 밟혔다,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뜻으로 쓰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성에게 차이는 것도 폭력배에게 맞는 것도 상대방이 나를 봐주지 않는 것도 모두 감정적으로 상처받을 법한 일인데 어쩌면 그렇게 '쿨하게' 표현하는 건지 상당히 현대사회다운 대응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쿨하다'라는 의미불명의 용어가 유행했던 것도 다 사회적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쿨하다'는 아시다시피 영어 'cool'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본래 영어에서 시원하다, 멋지다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감정 정리가 명쾌하거나 뒤끝이 없다는 뜻으로 많이 씁니다. 뭐 요즘같이 감정적으로 얽히기를 거부하는 시대, 힘겨워하는 시대에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시원시원하고 멋지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때로는 '쿨함'을 강요하는 시대에 사는 건 감정을 자제하라는 뜻으로 느껴져 보기 안쓰러울 때도 많습니다. '쿨하다'는 게 대체 누구 입장에서 멋지고 깔끔한 걸까요.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세대 간의 갈등과 차이점을 때로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서 가장 약아빠진 방말숙(오연서)는 영악한 젊은 세대의 일원입니다. 방말숙은 자신이 원하는 고가의 명품을 얻어내기 위해 남자들을 이용해왔고 헤어질 때는 '쿨하게' 헤어지곤 했습니다. 끝까지 대가를 바라며 들러붙는 남자들은 벌레 취급했고 때로는 울고 불고 매달리는 남자의 순정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한 차세광(강민혁)에게 '까이는' 입장이 되고 보니 도저히 쿨할 수가 없죠.
차세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여자든 자기 멋대로 '요리'할 수 있고 누나 차윤희(김남주)가 어렵게 모은 돈으로 차사고 데이트하고 몰래 휴학해서 사업까지 하는 이 건방진 남동생. 방말숙이 자신에게 반드시 넘어올 거고 또 방말숙이 자신에게 홀딱 빠졌을 때 차버릴 수 있다고 믿는 이 남자도 방말숙에게 도저히 쿨해지지 않습니다. 그동안 즉흥적으로 사귀었던 여자들과 달리 방말숙은 정말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된장녀에 속칭 '싸가지'에 못된 구석이 있어도 매력적으로 느껴진 그런 여자가 펑펑 우는데 무 자르듯 감정이 잘라질 리가 없겠죠.
말숙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의 한계?
사실 드라마를 처음 볼 때 방일숙(양정아), 방이숙(조윤희), 방말숙이란 이름에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더군요. 시골에서 자라 더 그랬겠지만 어릴 때는 영자, 말자, 복자, 종말, 언년, 삼순, 꼭지같은 이름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언년'같은 이름은 할머니들의 성함이라 우리 세대와 상관이 없지만 70, 80년대생 중에도 대충 이름지은 티가 나는 여자이름이 흔했습니다. 반면 그 집안의 아들형제 이름은 항렬자를 써서 한자로 지은 경우가 태반이었죠. 아주 옛날에는 아이 이름을 '개똥'이처럼 막지으면 건강하고 무병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있었다는데 '말숙'같은 이름은 그런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과거 드라마 '아들과 딸(1992)'에서 묘사된 귀남(최수종)과 후남(김희애) 남매가 그런 이름을 가진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귀남이는 귀한 아들이라 귀남이고 후남이는 아들을 더 낳으라는 뜻에서 후남, 귀남의 누나인 큰 딸은 더이상 딸낳지 말란 뜻에서 종숙, 막내딸은 더 아이를 낳지 말란 뜻에서 종말이라 지은 것입니다. 극중 일숙의 이름은 별다른 뜻없이 첫째딸이란 뜻이고 이숙은 둘째딸, 말숙은 막내딸이란 뜻 밖에 없습니다. 딸들을 속깊이 사랑하는 점잖은 아버지 방장수(장용)의 행동에 비해서는 정말 성의없이 지은 이름입니다.
지금이야 극중 할머니 전막례(강부자)가 딸이든 아들이든 어떻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시대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귀해도 딸은 살림밑천일 뿐이라 왜 딸에게 공부를 시키느냐며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험한 직장에 다니라 재촉하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은 재산도 당연히 큰 아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랬구요. 그러나 그런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을 가진 극중 말숙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 만을 위해 사는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아니 자기만을 위하다 못해 남의 것까지 탐내는 못된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더 가관인건 알아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예쁜 얼굴에 애교있는 성격에 마음만 먹으면 공부도 무엇도 할 수 있는 환경을 타고났으면 자신을 위해 더 열심히 살 것같은데 이 여자는 영악하게도 남자 등이나 쳐먹는 태도로 다른 여자들까지 욕먹이는 짓을 하고 다니더니 멍청하게 자신을 사귀다 뻥 차버리겠다는 남자에게 홀랑 넘어가서 울고 불고 카드값 없어 절절 매고 난리도 아닙니다. 시누이 차윤희에게는 온갖 시누이 노릇을 다하더니 자기는 더한 시집살이를 시킬 차세광에게 홀딱 빠져 있습니다.
차윤희의 엄마 한만희(김영란)는 몸소 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어머니입니다. 차윤희가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며 결혼도 아이도 거부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엄마의 삶을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올케 민지영(진경)과 차윤희를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면 한만희 역시 시집살이를 시킬만한 그런 타입의 여성입니다. 독한 직장 상사에게 당한 직원이 더 독한 상사가 된다던가요. 한만희는 가끔씩 며느리 민지영에게 날카로운 칼날을 세웁니다. 그런 한만희가 말숙같은 얄미운 며느리를 곱게 두고볼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난번 상견례로 손윗동서가 될 민지영 역시 말숙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전화로 온갖 흉을 보는 그런 사돈을 너그럽게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을까요. 원리원칙을 따져 상대방을 KO시키는 결코 만만치 않은 '형님'이 될 것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집안 살림 보태주고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오빠 차세중(김용희)에게 사업자금까지 마련해준 차윤희 역시 사사건건 자신을 괴롭히던 말숙이 이쁘기만 할 리가 있을까요. 돈 헤프게 쓰는 동생을 이단옆차기로 날릴 때처럼 당차게 훈련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숙과 세광의 특징은 계산적인 사랑을 하는 젊은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자기들은 영리하고 똑똑해서 포스팅 초반부에 언급한 '쿨한' 관계가 가능할 거라 착각하지만 진짜 관계에서 '까이고' 나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기들 역시 운명적으로 끌리는 사람에 빠지면 상대방의 불합리한 조건이나 네가 손해니 내가 손해니 하는 계산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별수없이 결혼하고 남들처럼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런지 세광에게 빠진 말숙이 한만희같은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세광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말숙이 워낙 못되게 굴어서 한만희네 집에서 독한 시집살이를 당했으면 하는 마음도 솔직히 조금 있습니다만 시집살이, 남녀 차별을 겪어본 세대가 아래 세대에게 불합리한 문화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하는 것도 사실이라 차윤희에게 독한 시집살이를 바랄 수만은 없는 심정이네요. 약삭빠르고 영악하게 살아도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못된 '말숙'이들의 한계를 극복헀으면 싶기도 하구요. 20대부터 70, 80대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이 드라마가 유쾌하면서도 가끔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그런 숙제 때문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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