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넝쿨째 굴러온 당신

넝쿨째굴러온당신, 아이가진 죄인이 된 차윤희 같은 여자가 더 무서워

Shain 2012. 6. 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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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학교에서 학부모의 직업을 조사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에게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작성해오게 했습니다. 가끔은 선생님이 그 조사서를 읽고 통계를 작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아마 공문 때문이었겠지요) 외부모 가정 아동이 몇명, 대졸자 학부모가 몇명, 직업이 상업인 사람이 몇명 이런식으로 합계를 내 대충 그 결과를 아이들에게 알려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대부분 반아이들 어머니의 직업이 '주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맞벌이 부부가 별로 없었던 거죠.

그 시대에는 일하는 어머니들 그러니까 요즘 말로 '워킹맘'이 흔치 않았습니다. 여자는 결혼하면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를 전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일하는 여성들이 있다 해도 생계형인 경우가 흔했습니다. 물론 생활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아닌, 그냥 일을 즐기는 '워킹맘'들도 있었겠지만 그녀들은 이해받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같은 여성들 조차 일하는 엄마들를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윤희가 임신하자 시댁은 아이를 위해 휴직하라 말한다. 결국 가족 투표로 결정.

'워킹맘'들에게 '남편이 버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그 시대. 그때만 해도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은 한정되어 있었고 제약이 많아 어느새인가 전문직 여성들은 결혼할 수 없다는 인식까지 생기곤 했습니다. 또 당시만해도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부부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소비 수준이 낮은 편이었기에 남편들 역시 일하는 아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직장생활로 갈등하는 부부가 많아 '수퍼맘 컴플렉스'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었죠.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그시절의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남자는 결혼해도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왜 결혼하면 직장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걸까. 왜 직장과 아이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할까. 원인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세상 탓을 하고 있기엔 그녀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밖에서는 임신을 이유로 자신을 밀어내려는 직장 안의 적들과 싸워야 하고 안에서는 아이의 안전을 이유로 일을 그만하게 하려는 가족들과 갈등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시댁에서 우왕좌왕하는 차윤희(김남주)는 아직도 80년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여자탓인 시대에 살아남기

극중 차윤희의 성격은 드세다 못해 사납습니다. 방귀남(유준상)은 그런 그녀의 적극적이고 당돌한 한마디로 '싸움닭'같은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윤희같은 타입을 싫어하는 남성들도 많습니다. 천재용(이희준)이 멋도 모르고 '여자가 어딜'이란 말을 입에 붙이고 다녔던 것처럼 많은 남성들은 자신의 할일을 빼앗는 여성들을 경계하고 라이벌로 인식하거나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그런 이유로 차문을 열어줄 정도로 친절한 남자 규현(강동호)은 이숙(조윤희)과 잘 맞지 않는 상대인것 같습니다).

차윤희가 가장 애정을 갖고 평생 공을 들인 일은 바로 자신의 직장입니다. 그녀는 드라마 PD로서 제작 총괄책임자로서 커리어를 쌓았고 사장이 500억 대작을 맡길 만큼 인정받는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최고의 가치는 자신의 일이고 자신의 능력인 셈이죠. 인간적인 모욕을 퍼붓는 감독이나 심술부리는 여배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우습게 보지못할 만큼 독하게 쏘아붙이며 일하는 윤희는 임신과 출신이란 부분만 빼면 여느 남성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고생하고 똑같이 일을 합니다.

욕하는 연습까지 해야한다고? 드세고 사납게 살아남는 차윤희.

반면 주부이자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엄청애(윤여정)는 운전도 잘 못하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운 편입니다. 그녀가 전막례(강부자)와 함께 윤희를 휴직시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아기의 안전 때문이라 합니다. 엄청애와 전막례는 윤희가 그 험한 직장에서 굳이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 직장 모두를 놓고 싶지 않은 윤희를 말리고 타이르고 집에 들어앉히려 하는 것입니다. 한쪽은 사회생활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한쪽은 가정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타협점이 생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임신한 사원을 해고시켜야하는 업체에도 입장은 있고 임신한 동료를 쫓아내면서까지 일을 차지하는 윤희의 라이벌에게도 입장은 있을 것입니다. 또 윤희가 짤려야 자리가 생기는 다른 남자 동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임신 때문에 프로젝트의 맥이 끊겨 힘들어하는 담당자도 있을지 모릅니다. 각자의 입장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직장에서 아이가졌다고 양해해달라 무조건 부탁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아이가진 여성을 배려하는 사회 분위기도 제도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윤희의 자리를 넘보는 직장 동료에 못되게 구는 시누이에 윤희의 발목을 잡는 여자들.

결혼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밀려나고 임신했기 때문에 쫓겨나고 출산한 뒤에는 자신의 경력을 살리지 못하는 이 환경에서 간신히 버텨냈다 해도 곤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거나 잘못 되면 시댁식구들과 사람들은 엄마가 돌보지 않아 그렇다고 할 것이고 퇴근을 일찍 할라치면 역시 애가진 여자는 일보다는 가정이 우선이라며 핀잔을 들을게 뻔합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모든 게 여자탓'인 이 시대에 직장가진 엄마는 죄인아닌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여야할 것이고 차윤희의 임신은 단지 그 신호탄일 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건 '같은 여자'들이 차윤희를 더욱 버겁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엄청애는 윤희에게 운전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윤희를 이해할 수 없는 시어머니입니다. 엄청애가 생각하는 가족은 여자는 조용히 집안일하고 남자는 바깥일하는 모습인데 '같은 여자'인 그녀는 윤희에게 그런 질서를 은연중에 강요합니다. 방말숙(오연서)이 예쁜 여자는 모든 걸 얻을 수 있다며 외모 지향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윤희의 라이벌인 여자 PD들은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자신들이 윤희를 밀어내고 성공할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윤희의 난처함을 눈치채 엄청애, 임신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주지만.

정말 차윤희의 대사처럼 '여자의 적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출산률이 감소한다면서 '아이를 낳으라' 하면서도 아이가진 엄마는 알아서 싸우고 생존하라는 이런 풍경. 아이를 가지는 순간 모든게 달라져버립니다.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녀들에게 다른 여성은 동료이기 보다 경쟁자일 뿐입니다. 아이가진 윤희가 어디에도 떳떳하게 임신했다 말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걸 '여자 탓'으로 돌리는 그 분위기야 말로 여자끼리 싸우게 하는 진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이나 시댁에 공개하고 축하받고 직장생활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씁쓸하지만 같은 아이라도 윤희의 아이처럼 환영받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방정배(김상호)의 아이처럼 무관심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도 있습니다. 또 아이를 낳지 못한 유산우울증으로 씻지 못할 죄를 짓는 장양실(나영희)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주부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일숙(양정아)도 있습니다. 임신과 출신은 결혼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남들처럼 아이낳고 기르고 똑같이 사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것은 아닌지 또 현대사회의 가족은 과거 보다 좀 더 관대해져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차윤희 커플은 '딩크족'인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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