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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유산, 방영자의 마지막을 보여준 듯한 외로운 생일파티

Shain 2013. 2. 3.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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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포털사이트 뉴스 기사가 드라마 보다 훨씬 더 자극적입니다. '백년의 유산'에서 민채원(유진)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내용을 보며 저렇게 멀쩡한 사람을 가두는게 가당키냐 하냐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월 26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몇몇 제보 사이트에서는 실제 며느리를 강제 입원시키려던 시댁 식구들 이야기가 올라오기도 했었구요. 또 '사랑과 전쟁'에서 올라올 법한 사연, 지독한 시집살이 끝에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리는 며느리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속 이야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돈과 위력을 가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괴롭힌다는 '막장 시어머니' 이야기는 '갑'이 '을'을 누르고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구는 사회 속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극은 대개 약자였던 주인공이 재력이나 위세를 얻어 자신을 괴롭히던 강자에 대항하거나 역으로 압박하는 내용입니다. 어차피 '강자'와 '약자'의 대립 문제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괴롭히는 내용이 되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는 내용이 되든 별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대신 소위 '하극상'은 패륜이란 지적 때문에 연출하기 힘들 겁니다.

모든 것을 기억해낸 채원은 남편과 시어머니를 이간질하며 복수를 시작한다.

'백년의 유산' 속 시어머니 방영자(박원숙)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며느리 민채원을 괴롭혔습니다. 결혼식 당일에 협박하고 임신이 안되게 해달라며 산부인과를 찾아가고 네 남편의 다음 아내는 네가 직접 골라보는게 어떻겠냐며 사진을 들이밀고 위자료를 비롯한 재산 분할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 공증하게 하고 마음에 안들면 머리채를 잡아 뜯는 등 반미치광이처럼 며느리를 들들 볶았습니다. 오죽하면 결혼한지 3년이 지났는데도 가족사진에선 채원의 얼굴이 빠져 있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원 조차 그 기묘한 이질감을 조금씩 눈치챌 정도였죠.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채원이 복수를 결심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채원은 억지로 정신병원에 갇혔던 공포와 자신을 학대하던 시어머니가 거짓으로 불륜을 엮었단 사실을 기억해내고 몸을 떨며 분노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그런 시어머니의 악행을 두고 보던 남편 김철규(최원영)의 폭행도 기억해냅니다. 이제부터는 절대 그냥 당하지는 않으리라 마음먹고 철규의 애정을 이용해 시어머니 방영자의 속을 긁어놓습니다. 방영자는 기억을 잃은 척 위장한 채원이 못마땅하지만 아들 등쌀에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둡니다.

3년동안의 악행을 어떻게 되갚아줄까. 채원은 기억을 잃은 척하며 서서히 칼을 간다.

가족극 그중에서도 '주말가족극'의 재미는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도 제자리로 돌아와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데 있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도 서로 얼굴을 보고 살지 않을 만큼 큰 다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사소한 갈등은 셀 수없이 많습니다. '백년의 유산'에서도 옛날국수집 엄팽달(신구)의 자식들은 보는 사람들을 웃음짓게 하는 우스꽝스런 재산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국수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둥 멀쩡한 식품회사 이사가 무슨 국수를 뽑느냐는 둥 갖은 핑계로 가업잇기를 거부하던 자식들이 백억 유산이라니까 너나할 것없이 국수집으로 몰려듭니다.

곗돈을 날려먹어 큰 손해를 본 큰아들 엄기문(김명수), 도도희(박준금) 부부는 회사에서도 짤릴 위기에 처하자 냉큼 엄팽달네 집을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돈때문에 지지고 볶고 살다 이혼 도장까지 찍었던 엄기춘(권오중), 공강숙(김희정) 부부는 아들 엄보름(이태우)까지 끌어들여 팽달에게 잘보이려 합니다. 막내딸 엄기옥(선우선)까지 피아노 학원을 휴업하고 국수집으로 달려갑니다. 돈도 되지 않는 국수사업, 그것도 오래된 점포에서 손수 국수를 뽑아 말리는 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아하던 자식들이 이젠 국수를 뽑겠다며 싸웁니다.

시끄럽기는 해도 국수집 사람들의 재산싸움은 그나마 인간미가 있다.

그래도 엄팽달네 재산싸움은 상당부분 인간적입니다. 돈 때문에 아웅다웅하기는 해도 시끌벅적한게 사람사는 집 같은데 방영자의 집안싸움은 한번 시작되면 가족이 붕괴되는 엄청난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방영자의 하나뿐인 아들 철규에게 채원은 둘도 없는 유일한 사랑이고 엄마 말 밖에 들을 줄 모르던 철규가 유일하게 고집부려 얻은 아내입니다. 그런 아내 채원이 독기를 품고 방영자에게 복수하기로 했으니 이혼하고 나면 방영자는 철규의 원망을 고스란히 듣게 됩니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는 거죠.

딸 주리(윤아정)도 사랑하는 이세윤(이정진)의 마음이 채원에게 있고 그게 방영자 때문이란 걸 알게 되면 엄마를 원망하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타입인 주리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가 이세윤인데 그 세윤과 올케의 불륜을 엮는 바람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주리는 제일 먼저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까 걱정하겠죠.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식을 위한다며 극성을 떨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면서도 뭔가 씁쓸한 가족의 붕괴입니다. 혼자 와인에 취해 케잌을 긁어먹던 방영자의 모습은 그녀의 악행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인 셈입니다.

혼자서 생일 케잌을 먹던 방영자는 제일 미워하던 며느리에게 무서운 말을 듣는다.

'어머님도 병원에 입원시켜 드려야겠다'고 속삭이는 채원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분통터지는 내용을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통쾌한 장면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구도가 조금씩 바뀌는 복수의 시작이기도 하구요. 반면 순수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살고 싶었던 한 여주인공이 인격이 파괴되는 오싹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못되게 굴었던 악행을 생각하면 더한 고통을 받아도 마땅한 방영자지만 자식들과의 생일 파티를 기대하며 식당에 갔다가 혼자 술마시고 쓰러지는 장면은 다분히 불쌍하기도 합니다. 사채업까지 하며 자식을 위해 독하게 살았던 캐릭터라 '효'를 강조하는 한국 정서에서는 좀 불편한 장면이기도 하구요.

무엇 보다 채원은 지금의 가족이 망가져도 또다른 희망이 있고 보듬어줄 진짜 가족이 있고, 또 새로운 사랑까지 나타날 것이지만 방영자는 채원의 복수를 계기로 하나 둘 모든 걸 잃게될 캐릭터라 어제의 쓸쓸한 생일파티가 더욱 인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자식들도 등돌리고 재산 마저 잃게 되면 방영자의 고생스런 인생은 모두 헛수고가 됩니다. 거기다 그게 '며느리 잘못 들인 탓'이 아니라 자기가 판 무덤이란 걸 알게 되면 속절없이 무너지겠죠. 마치 방영자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복선인 듯해 흥미롭게 본 것은 사실입니다만 칠십 노인이 홀로 생일을 맞는다는 건 영 안쓰럽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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