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민준국(정웅인)은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어떤 것이든 생명을 살생하는 '정당한' 이유는 없겠지만 민준국 역의 정웅인은 민준국이란 캐릭터에게는 살인을 멈출 수 없는 그럴만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방송된 내용으로 보아 민준국이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것과 박수하(이종석)의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법과 법관들을 불신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인터뷰를 읽는 순간 떠오른 영화가 '모범시민(2009)'입니다.
영화 '모범시민'의 주인공은 아내와 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에 걸맞는 응당한 처분을 요구하지만 담당검사가 형량 거래를 시도하는 바람에 범인은 가벼운 형벌을 받고 풀려나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 범인과 담당검사에게 훨씬 더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하며 법의 불합리함을 비판하고 나섭니다. 이 영화는 결말 부분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평범한 시민에겐 법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공감을 얻었죠. 주인공이 선택한 '살인'이란 방법에는 동조할 수 없어도 법체계를 폭파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는 법을 제대로 이용하는 사람들 보단 법을 잘 몰라서 혹은 법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국선전담이 된 장혜성(이보영)이 맡는 피의자들이 모두 변호하고 싶은 타입들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큰 벌을 받아 마땅한 다단계 사기꾼도 있고 장님 행세를 하는 치한도 있습니다. 장혜성은 국선전담으로 그들을 변호하는 자신의 처지에 회의를 느끼며 죄를 처벌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서도연(이다희)과 협력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박수하와 장혜성은 남의 마음을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박수하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으로 남의 마음을 보게 됐고 장혜성은 최대한 피의자의 입장을 헤아려 법의 혜택을 받게 해줘야합니다. 무료신문을 가져가는게 왜 불법인지 모른 할아버지의 속사정과 폭행하는 남편을 살해한 아내의 정당방위와 범인도 아닌데 죄값을 치르게 된 고성빈(김가은)의 마음을 들어주는 것이 장혜성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수하와 혜성은 민준국의 과거는 알아보려 한 적이 없습니다. 민준국은 혜성과 수하에게 뭔가 깨닫게 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수하 아버지와 민준국 사이의 비밀은?
수하아빠 박주혁(조덕현)이 기자라는 것은 민준국 역의 정웅인을 통해 밝혀진 내용입니다. 어제 방송분에서 박수하와 실내낚시터에서 만난 민준국은 네 아버지가 내 아내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에 충격받은 박수하는 민준국과 대립했으나 민준국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박수하를 음주운전을 하던 할아버지가 치었고 박수하는 기억상실 증세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민준국은 스스로 왼손을 절단해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고 과일가게 아주머니를 시켜 박수하를 신고하게 했습니다.
혜성의 어머니 어춘심(김해숙)을 살해할 때도 그랬지만 민준국은 '무죄 판결'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하의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과실치사로 무죄방면을 노리던 민준국은 어린 수하와 혜성의 증언으로 유죄를 받게되자 엄청나게 분노하며 죽일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어춘심을 살해하고도 차관우(윤상현)를 이용해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쌍둥이 살인 사건의 쌍둥이들이 그랬듯 법을 악용해 증거없음, 무죄추정의 원칙을 근거로 빠져나오고 싶어했던 것이죠. 챙길 가족도 없는 민준국은 복수에 성공했으면 그만인데 왜 무죄에 집착했을까요?
일단 박주혁과 민준국 사이의 일은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많이 없는 상황입니다만 박주혁은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뭔가 민준국에게 나쁜 일을 저질렀거나 사고를 일으켰는데도 무죄로 풀려났을 거란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게 법적으로 처분이 안되는 과실이거나 법정 증언같은 거라 합법적으로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는거죠. 그리고 첫회에서 민준국이 박주혁을 살해할 때 트럭을 이용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교통사고에 관련된 위증으로 민준국의 아내를 죽게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남의 숨겨진 사연을 알리고 전달하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극중에 등장하는 경찰 운승(여호민)이나 습관적으로 판결하는 법관들처럼 기자도 국민들에게 무심한 직업으로 비난받곤 하죠. 경찰은 혜성이 위험한 상황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할인쿠폰을 뒤지며 아빠와 단둘이 차를 달릴 때 나눈 대화내용으로 보아 수하엄마는 꽤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첫회부터 수하 아버지 차에 매달려 있던 펜던트, 꾸준히 등장한 수하의 펜던트는 어쩐지 수하 가족의 사연이 담긴 물건 같습니다. 수하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가 혼자 남아야하는 수하 때문인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민준국이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장혜성의 증언 때문입니다. 혜성을 무시무시하게 협박하고 분노한 이유가 뭐였을까요. 복수와 동시에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목적때문에 살인하고 무죄판결을 받으려했던 것같은데 장혜성이 그런 민준을 방해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민준국은 자신의 살인으로 '모범시민'의 아버지처럼 무언가 하나씩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두번째, 법정 안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다
어제 밝혀진 또다른 내용은 민준국의 죄를 증명했던 장혜성이 거짓말을 했다는 점입니다. 장혜성은 민준국이 수하아버지를 쇠막대로 폭행하는 장면을 보았고 핸드폰으로 그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서대석(정동환) 판사에게 증거로 제출한 그 핸드폰에 민준국의 범죄 장면이 촬영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0여년전의 핸드폰은 최신 핸드폰처럼 그리 화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찍혔으리란 보장도 없었습니다.
당시 법정 안의 상황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어린 수하의 말 때문에 민준국에게 유리한 상황이었고 장혜성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어린 수하는 멀리 떨어진데다 어두워서 장혜성의 얼굴은 전혀 본적이 없음에도 '이 사람이 목격자가 맞냐'는 서대석 판사는 질문에 거짓말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서대석 판사는 카메라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유죄를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공포탄일 뿐이다'는 서대석의 대사는 범죄자를 잡는게 더 중요하다는 서대석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서대석이 25년형을 구형한 황달중(김병옥)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병원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왼손이 잘린 옛날 아내(김미경)를 만난 황달중은 깜짝 놀랍니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흐름상 서대석은 모종의 죄책감으로 황달중의 딸인 서도연을 입양해 친딸로 키우고 있는 것같은데 어찌 보면 도연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서도 황달중을 그대로 감옥안에 가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황달중은 무죄임을 증명할 수 없어 25년형을 구형받아야 했습니다. 황달중의 아내가 그런 일을 꾸민 이유는 어제 잠시 등장한 폭행과 주사 때문일지도 모르죠.
서대석은 과거 민준국을 유죄로 만들기 위해 도와달라고 찾아온 장혜성에게 민준국의 감방 동기를 증인으로 이용하라며 거짓증거 조작을 조언한 적이 있습니다. 서도연은 그 말대로 황달중을 이용했지만 꼼꼼한 차관우에게 논리적 오류를 지적당합니다. 이 드라마 첫회부터 장혜성이 보았던 법정에는 꽤 많은 거짓말이 등장했습니다. 시청자들 모두가 진실을 말한 용감한 목격자로 생각했던 장혜성 조차 범죄 현장을 찍은 사진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위증'은 민준국과 관련된 또다른 키워드인 셈입니다.
여기서 박주혁이 '입을 잘못 놀려 죽었다'는 민준국의 대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증인들은 고성빈 판례에서 알 수 있듯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정당한 죄값을 치러야한다는 생각으로 과장된 증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반 친구들은 고성빈이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날나리라서 친구를 밀어 떨어지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군중심리나 억측으로,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까 또 나쁜 놈이니까 하는 마음에 남의 죄를 객관적으로 보려하지 않는단 뜻입니다. 기자인 수하 아버지가 저지른 죄는 어쩌면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세번째, 민준국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싶다?
신상덕(윤주상)은 25년간 억울한 옥살이 중인 황달중을 돌봅니다. 변호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유일하게 황달중의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이기에 황달중은 신상덕을 고마워하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추정되는 사람에게도 고성빈같은 억울한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고 쌍둥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있고 폐지줍는 할아버지처럼 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상덕은 변호인이 범죄자의 죄를 덮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듯합니다.
핸드폰 벨소리인 'I'll be there'는 70년대에 어린 마이클 잭슨이 불렀던 히트곡이죠. 정감있고 따뜻한 그 노래가 장혜성과 박수하에게는 끔찍하고 공포스럽지만 민준국에게는 죽은 아내와의 사연이 담긴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민준국의 마음은 들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으면 고아나 다름없는 장혜성에게 가장 소중한 엄마를 살해하고 분노하는 수하에게 무죄판결로 풀려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먹물먹은 등신'이란 말로 엘리트 법관들을 경멸하는 민준국은 박수하를 신고한 과일가게 주인까지 죽였습니다.
어쩌면 박수하는 자신이 들었던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기억을 잃었을 지도 모릅니다. 나에겐 소중한 아버지가 남에겐 나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거죠. 민준국이 살인을 계속하는 이유도 목적도 박수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내 낚시터에서 '네가 10년전 나랑 다를게 뭐냐'며 자신을 죽이라고 박수하를 도발하는 민준국은 목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박수하와 변호사인 장혜성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 같습니다.
박수하도 민준국처럼 복수에 사로잡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수하에게는 자신을 알아주는 장혜성이 있었고 장혜성도 모진 복수심에 사로잡히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박수하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경찰도 법관도 알아주지 않던 진심을 들어준 사람입니다. 반면 민준국은 '세상 끝에 홀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목소리가 장혜성과 박수하의 목소리였다면 지금부터 들려줄 목소리는 범죄자 민준국의 목소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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