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LA다저스 박찬호는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박찬호를 모르면 간첩'이라 놀릴 만큼 화제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한양대학교 92학번 박찬호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가요계의 제왕 72년생 서태지와 73년생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대한민국을 휩쓴 초대형 신드룸으로 9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박찬호'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공식적으론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는 민족적인 이유였으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젊은 벼락부자'에 대한 부러움이 깔려 있었죠. 80년대의 노다지가 부동산 투기였다면 90년대의 노다지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습니다.
'황금의 제국'은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90년대는 재벌들과 서민들 모두에게 중요한 경제적 변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대한민국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다지'를 캐낸 재벌들이 그들이 쌓은 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서민들은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평생직장의 꿈이 깨어져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잇게 되던 때입니다. 재벌들이 쌓은 황금의 성은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고 서민들이 꿈꿀 수 있는 '노다지'는 복권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에덴'이 부동산으로 재미보던 그 시기가 끝물이라면 끝물이었죠.
요즘 '막장'이란 표현을 많이 쓰긴 합니다만 현대인들 중 진짜 '막장'을 구경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광물을 캐는 광산촌이 예전 보다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하는 '막장'은 인생을 갈 때까지 간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채광작업이 워낙 힘들기도 했지만 안전장비가 발달하지 않아 굴을 파다 파묻히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험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사람을 '막장인생'이라 표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덧붙여 '노다지'나 '황금'을 찾는 사람들도 '막장'으로 분류하곤 했습니다.
가끔 절박한 순간에 로또나 도박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빚에 쪼들리던 사람이 가진 돈을 모두 모아 도박판에 끼어들고 내일 밥사먹을 돈도 없으면서 로또를 대량 구입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일정 수준의 수입과 생계가 보장되는 사람들은 굳이 일확천금을 꿈꿀 이유가 없습니다. '노다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이고 아메리카 대륙의 초기 개척자들 중에는 그런 이유로 모험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금광이나 보난자(Bohnanza, 노다지)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던 셈입니다.
성진그룹의 최동성(박근형) 회장은 치매 증세를 보이는 노년의 호랑이입니다. 동생과 함께 그룹을 일군 최동성은 젊은 시절 한국땅에서 노다지를 캤습니다. 기업합병과 부동산 투기와 건설로 막대한 부를 일군 그에게 마지막 남은 과제는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제국을 단단하고 안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지주회사 중심의 순환투자로 그룹 계열사를 더욱 강력하게 지배하고 아주 적은 비율의 주식 만으로 경영권을 방어하는 일은 그가 건설한 제국을 외부로부터 침략당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최동성은 그룹을 서윤에게 물려주는 마지막 임무를 무사히 성공시켰습니다.
조카 최민재(손현주)를 상대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그래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최민재와 최서윤(이요원)은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며 성진시멘트를 지주회사로 지정한 최동성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최동성은 안전하게 제국의 황제 자리를 최서윤에게 물려주었으니 더 이상 공석에서 호랑이같은 카리스마를 선보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최동진(정한용) 회장의 형으로 배고픈 전쟁고아로 노다지를 찾아헤매던 그의 시대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최서윤은 그의 제국을 지키는 전쟁을 물려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최동성 회장이 선보인 사장단 회의의 풍경을 보며 과거 말 한마디로 간부들을 제압했던 현대그룹 왕회장을 떠올렸던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드라마는 특정 기업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극중 에피소드 몇가지는 재벌가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을 때까지 가신들을 제압했던 왕회장의 카리스마는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전설'같은 이야기죠. 가난한 대한민국에서 부를 일군 재벌 창업주들은 그들의 금광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
습니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재벌이 될 수 있는 기회도 막혔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젊은 사자 장태주(고수)는 '노다지'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폐광이나 다름없는 성진건설의 주식을 다량 사들여 최민재와 함께 성진건설을 사들이는 그는 윤설희(장신영), 나춘호(김강현)와 함께 박찬호의 돈을 부러워합니다. 부동산 투기 현장을 쫓아다니며 '한방'을 꿈꾸던 그들은 마치 금광을 찾아헤매던 개척시대의 모험가들같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노다지가 있는 곳엔 검은 돈이 흘러다니고 조필두(류승수)같은 주먹질하는 깡패가 있고 웃음을 파는 여자가 있습니다. 장태주는 최민재와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현대판 노다지 사냥꾼의 길을 선택한 셈입니다.
최민재는 사장단 회의에 들어가면서 아내와 동생을 제물로 바쳤다며 이제는 제사장이 될 것이라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민재와 태주의 희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재를 대신에 감옥에 가겠다는 늙은 아버지와 자신을 사랑한다는 아내 유진(진서연), 태주의 동생 희주(윤승아)와 태주에게 마음이 있는 윤설희까지 마지막 하나까지 탈탈 털어서 바쳐도 황금의 제국이 길을 보여줄지 미지수입니다. 마지막에는 장태주 자신을 제물로 바쳐 성진그룹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닐지 첫회에서 본 피묻은 손가락이 잊혀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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