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side/오락가락

드라마의 전설 김종학 PD, 이렇게 아쉽게 가다니

Shain 2013. 7. 2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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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김종학 프로덕션'의 전 대표였던 김종학씨가 사망했다는 기사였습니다. 한 고시텔에서 발견된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추정되고 있다는데 최근 드라마 '신의'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해 구설에 올랐다는 건 본 적이 있습니다만 이런식으로 운명을 달리할 줄은 몰랐네요. 그의 사망소식과 함께 김종학 PD가 과거 제작한, 파란만장한 80, 90년대 인기 드라마들이 하나둘 떠오르더군요. 김종학하면 드라마였고 드라마하면 김종학이던 시대가 이렇게 마무리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요즘 말로 드라마계의 '전설 오브 레전드'가 바로 김종학이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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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셨던 분들은 그때가 MBC 드라마의 황금기였노라 회고하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의 소재가 지금 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폭넓었으며 전속 탤런트로 양성된 배우들의 연기 수준이 탁월했습니다. 공영방송 KBS에 비해 자본도 역사도 뒤쳐지던 MBC는 80년대를 거치면서 '드라마 왕국'으로 성장했고 그런 놀랄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비결이 바로 김종학과 이병훈 PD입니다. 요즘 드라마 팬들은 잘 모르지만 80년대 MBC에서 드라마 흥행의 기본공식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요즘도 화제가 되는 수사극 '수사반장(1981)'이나 이병훈 PD와 함께 제작했던 '조선왕조오백년(1983)', 북한의 정치사를 묘사한 '동토의 왕국(1984)', 월북한 여배우 문예봉의 이야기를 그린 '북으로 간 여배우(1986)'나 남과 북으로 갈라진 두 명의 남자와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한 여인을 통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풀어간 '여명의 눈동자(1991)'.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비극의 현대사를 드라마틱하게 엮은 '모래시계(1995)'같은 대작들이 김종학 PD의 손을 거쳐 탄생되었습니다.

이병훈 PD가 '역사' 속 기록을 가볍고 유쾌한 시선으로 '옛날 이야기'처럼 풀어낸다면 상대적으로 김종학 PD는 어떤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든 시사성과 현실을 잊지 않는 진지한 시선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병훈 PD가 '자기 복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이병훈식 사극'이라는 특유의 장르를 만들어내며 시청자들에게 어렵지 않고 편하게 접근하는 타입이라면 김종학 PD는 다소 부담스럽고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설득력있게 묘사하는 편이었죠. 두 사람 모두 천부적인 드라마 제작자입니다.

늘 현장에서 장면을 하나하나 지시하며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였던 PD답게 손을 든 사진이 많다.


특히 김종학 PD의 대표작인 '여명의 눈동자'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금기시했던 특별한 캐릭터들을 선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종군위안부, 일명 정신대로 끌려가야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TV에서 공개하지 않던, 숨겨진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인들 스스로도 그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언론이나 드라마에서 집중조명하지 않았던 역사를 김종학 PD는 드라마로 엮었고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친일경찰, 과거 고등계 형사 스즈키(박근형)가 광복 후 경찰 고위직으로 임용된 것도 우리가 숨겨왔던 현실이었죠.

'모래시계'는 TV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묘사한 드라마로 평가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80년대 내내 각종 언론이나 방송에서 외면했던 주제였습니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했지만 유언비어로 취급받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왜곡된 소문만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상태였죠. 고현정, 최민수, 박상원이 엮어낸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김종학 PD 특유의 시사성이 빛을 발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만 방송되던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송되는 시간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태왕사신기', '북으로 간 여배우', '회천문', '남한산성'


김종학씨가 설립한 '김종학 프로덕션'은 우리 나라 최고의 드라마 제작사로 현재 방송중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추적자(2012)', '마의(2012)', '하얀거탑(2007)' 등이 모두 '김종학 프로덕션'의 작품입니다. 외주제작사로서 '김종학 프로덕션' 만큼 잘 나가던 곳도 드뭅니다. 한국의 드라마 역사를 쥐었다 놓았다 한 제작자답게 '김종학 프로덕션'이 만든 드라마들은 작품성, 대중성 모두에서 큰 두각을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의 제작사 조차 적자 운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우리 나라 드라마가 외주 제작되기 시작한게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죠. 김종학씨는 1998년에 MBC를 퇴사하고 송지나씨와 함께 '김종학 프로덕션'을 만들었습니다만 과거 '여명의 눈동자'나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같은 사극에 투자하던 만큼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는 외주제작사의 한계를 느낀 것 같습니다. 특히 화려한 그래픽으로 화제가 된 '태왕사신기(2007)'는 드라마 컨텐츠의 산업화를 꿈꾸며 '오로지 작품 만 생각하겠다'는 김종학씨의 의지가 드러난 드라마였으나 40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1992년 '여명의 눈동자'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던 모습.


방송국에게 하청받는 식으로 제작되는 우리 나라 드라마 외주 제작 시스템이 엉망인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프로덕션이라는 '김종학 프로덕션'이 이 정도였으니 작은 외주제작사가 걸핏하면 출연료 지급을 못해 도산하는 시스템이 이해가 갑니다. 평생 드라마만 생각하고 드라마 밖에 모르던 PD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출연료 미납'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외주 제작을 하면서 '작품' 만 생각했다간 살던 집까지 팔아야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해도 만성적인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더군요.

외주 제작 시스템이 정착된 이후 지나치게 시청률을 의식한 드라마가 종종 문제가 되고 소위 막장드라마라 불리는, 흥행공식에 꿰맞춘 드라마를 앞다투어 제작하는 풍토가 생겼습니다. 스타급 배우 출연료와 깎여서 지급되는 제작비로 높은 시청률을 올리자면 협찬과 노골적인 PPL은 필수입니다. 드라마계의 전설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훌륭했던 제작자 한명이 이렇게 아쉽게 떠나고 보니 한국 드라마가 '막장' 시스템에 맞춰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작품만 생각하고 싶다'는 드라마 PD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든 바람인 것일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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