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TV 사극 이야기(3), 혜경궁은 정말 첩지머리에 족두리를 썼을까?

Shain 2013. 9. 28. 14:32
728x90
반응형

얼마전 인터넷 검색 중에 한복과 서양의 웨딩드레스를 퓨전해서 만든 작품을 보았습니다. 제가 놀란 건 신부 모델이 머리에 쓰고 있는 하얀 족두리였는데 우리 나라 전통 혼례에서 입는 활옷, 원삼을 웨딩드레스처럼 변형시킨 것까진 그렇다고 치지만 신부에게 흰색 족두리를 착용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뭐 원래 따지고 보면 흰색 자체도 우리 나라에선 소복을 의미하는 색이고 평소에 즐겨입던 일상적인 옷도 흰옷으로 입긴 합니다. 그러나 '흰 족두리'는 흰옷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상을 당했을 때만 쓰던 상례용품이라 아무리 퓨전이라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던거죠. 전통 상례를 보고 자란 부모님은 한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것도 흰색 한복도 싫어하십니다.

가짜로 추정되는 명성황후 사진, 순정효황후의 사진, 덕혜옹주, 흰족두리는 원래 상례용이다.

 

요즘 사극을 보다 보면 이런식으로 뭔가 아니다 싶은 고증이나 예법이 참 많지요. 우리 나라 사극의 고증 기준은 일단 일제강점기까지 현존했던 조선 황실입니다. 80년대까지는 그래도 황실에서 살던 상궁이나 황손이 살아있어 여러 증언을 얻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조선 황실 자체가 잊혀진 존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극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논란이 되는 명성황후의 흑백사진을 보면서도 그 사진이 왜 어떤 이유로 명성황후가 아닌지 정확히 지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사진 속의 여인은 떠구지 머리를 하고 원삼 자락 아래로 발을 드러낸채 앉아 있습니다. 떠구지가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다른 여인들 보다 크니까 명성황후가 맞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차라리 그냥 한복 차림새였다면 혹시 명성황후가 맞나 했겠지만 원삼을 입고 선봉잠, 용잠, 대란치마를 갖춰입지 않은 여인을 어떻게 황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 순헌황귀비나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궁중 여인들은 예장을 갖출 때는 발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서양에서 드레스 자락을 치렁치렁 끌고 다녔듯 조선황실의 궁중 예장도 바닥에 끌릴 만큼 화려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망부석(1963)'에 등장한 혜경궁 홍씨와 화완옹주.

 

왕실은 경우에 따라 예장을 다르게 입는데 떠구지 머리를 얹을 정도면 공식 행사고 자신의 신분에 맞춰 화려하게 갖춰입어야한단 뜻입니다. 용잠 하나 올리지 못할 신분이면 높아야 상궁이고 사진이 흐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왕족들에 비해 어염족두리도 좀 이상합니다. 결국 이 사진은 상궁들의 정장 차림이거나(상궁 특유의 깐깐함으로 보아 상궁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사진찍으려 아무나 데려가 연출한 사진으로 명성황후가 아닐 것이란 추정이 가능합니다. 왕실 복식이 확립된 조선 후기에 명색이 왕후란 사람이 그 사진처럼 물색없이 입진 않았을거란 거죠.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왕실의 사진을 보면 직조 기술이나 바느질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 복식이 화려하면 얼마나 화려했을까 싶지만 의외로 당의와 함께 갖춰입는 스란이나 대란의 무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고증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 즉 조선 황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사극'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당의가 소례복으로 정착된 것도 조선 후기(18세기 이후)라는 점입니다. 왕실 아닌 민간에서 금박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조선 말기가 되서야 가능한 일이었고 용과 봉황처럼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장식이 퍼진 것도 조선 후기였습니다.

'대왕의 길(1998)'에서 연출된 혜경궁 홍씨와 화평, 화완옹주. 족두리와 화관이 인상적이다.

사실 요즘 나오는 사극 대부분의 왕실 복식은 18세기 이후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공주의 남자(2011)'에서 궁중 여인들이 당의를 입고 등장한 것도 '불의 여신 정이'에서 인빈이 풍성한 당의가 아닌, 날렵한 모양의 당의와 봉황 비녀를 꽂은 것도 '장옥정'의 여인들이 첩지머리에 이것저것 달고 뛰어다닌 것도 '마의'의 공주를 비롯한 왕실여인들이 동그랑땡 첩지와 나이에 맞지 않는 배씨댕기를 착용한 것도 이런 저런 사극에서 오조룡보와 사조룡보를 함부로 쓰고 조선말기 형식과 헷갈리는 것도 사실은 고증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극은 '여인천하(2001)'를 기준으로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세련된 한복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조선 중종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여인천하'는 무늬있는 옷감과 나무 떠구지를 이용하는 등 몇가지 부분에서 틀렸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와 당의 그리고 그때까지 사극에서 쓰지 않던 어염족두리(가체와 머리 사이에 올리는 둥근 모양이 솜족두리)를 얹는 등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여인천하'의 인기와 함께 화려해지기 시작한 사극은 결국 '왕과 나(2007)'에서 현대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6년만에 만들어진 같은 PD의 작품임에도 고증은 그 사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여인천하(2001)'의 문정왕후와 '왕과 나(2007)'의 인수대비. 어느새 사극에 퓨전 복식이 대세가 된다.

 

조선 영조, 정조 시기는 가체를 금지하고 왕실여인들이 첩지를 쓰기 시작한 시기로 유명합니다(체계금지령). 사극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숙종 시기까지는 가체(어여머리)를 쓰는 것이 맞고 그 이후에는 첩지머리가 맞다는 걸 상식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김혜수의 '장희빈(2002)'은 허리까지 오는 긴 저고리에 큰 가체 그리고 봉작에 맞게 입은 당의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 숙종 때의 복식 고증을 가장 완벽하게 한 사극으로 꼽는 것도 이 드라마입니다. 그 이전의 사극은 사료가 없거나 자본이 없어서 그 정도의 고증을 해내기 힘들었지요.

그런데 조선 영조 시기부터는 무조건 가체 대신 '첩지'를 썼다는게 맞는 말일까요. 그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조 때부터 갑자기 숙종 시기와 다르게 조선 후기와 비슷한 당의와 머리 장식을 썼다는 건 좀 무리가 있습니다. 체계금지령이 내려진건 영조 32년이고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가체 대신 첩지와 족두리를 권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조 시기에 가체를 금지하고 쪽머리를 권장한 걸 보면 그때까지도 가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다는 이야기죠. 우리가 흔히 보는 쪽머리는 조선 순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오백년 한중록(1988)', ''하늘아 하늘아(1988)'의 혜경궁은 가체를 하고 있다. 왜 그럴까?

 

포스팅 첫부분에 언급한 흰족두리처럼 족두리도 우리 나라 복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몽고에서 전해진 족두리와 당나라에서 전해졌다는 화관은 혼례복 뿐만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 예복에 착용하던 머리장식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1961년에 제작된 신영균 주연의 영화 '연산군'에서는 왕실 여인들이 모두 족두리와 원삼을 입고 궁밖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면류관 줄이 9개나 12개가 아닌 20여개에 곤룡포를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때나 예복을 입는 등 전체적으로 엉망입니다만 연산군의 생존시기가 조선전기라 '족두리'를 선택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조선황실의 덕혜옹주도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화관을 착용한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극에서 공주, 옹주들에게 족보없는 배씨댕기 보다는 족두리나 화관을 씌우는게 경우에 더 맞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가체를 금지한 영조 후반기나 정조 시대에는 궁중여인들이 화관이나 족두리를 예복과 함께 착용하는 것이 애매한 가체나 첩지 보다 더 맞는 것같단 생각이 듭니다. 첩지도 화과자, 동그랑땡을 닮아가는 요즘에 족두리나 화관을 부활하자는 말이 웃기게 들릴지는 몰라도 '대왕의 길(1998)'이나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2007)'에서 보여준 족두리는 단아하고 예뻤죠.

영화 '연산군(1961)'의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고증은 엉망이나 화관, 족두리는 실제 쓰이던 물건이다.

 

사극의 고증 문제는 인물부터 시대상까지 그 범위와 분야가 다양하기 때문에 단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고증에 신경썼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는게 바로 궁중여인들의 복식입니다. 다른 시대상이 모두 적절해도 공주나 후궁이 동그랑땡 첩지를 하고 나오면 고증은 물건너갔구나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니까요. 시청자들은 이미 혜경궁 홍씨의 머리가 가체인지 첩지가 맞는지 아니면 족두리가 맞는지 토론하고 판단하는 수준인데 복식고증은 협찬받는 업체나 좀 더 화려하게 하라는 입김이 들어오면 단박에라도 뒤집혀버리는 사소한 것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혜경궁 홍씨를 포스팅 제목에 거론한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복식은 그 시대의 변화를 모두 거쳤기 때문입니다. 각종 예식이나 평상시 머리 장식으로 가체를 쓰던 영조시대 여인들은 체계금지령 이후 첩지나 족두리 장식을 선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1744년(영조 20년) 혜경궁 홍씨와 결혼했습니다. 체계금지령이 내려지기 12년전이니 그1756년 이전에는 혜경궁 홍씨도 가체를 올리고 큰행사에는 다리로 만든 대수머리, 큰머리를 올리고 숙종 시기와 비슷한 당의를 입고 당의에는 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가족이 쓸 수 있는 흉배가 달려 있었을 것입니다.

'이산(2007)'의 혜경궁홍씨는 빈과 같은 급의 예장을 하지만 '8일(2007)'에서는 흉배를 달고 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사망한 1762년 후에는 많은게 달라집니다. 혜경궁은 세자빈으로 1752년 정조가 태어났을 때부터 첩지 혹은 족두리를 이용했으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동궁이 되었을 땐 공식적으로 왕의 모후가 아닌 당호를 하사받은 궁중 여인이 되버리고 맙니다. 드라마'이산(2007)'에서는 그런 혜경궁 홍씨가 '빈' 첩지의 후궁들과 비슷한 봉작의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8일(2007)'은 정조 등극 후 흉배를 다는 것으로 설정했더군요. 추촌왕의 아내 자격이면 흉배도 맞겠지만 끝까지 빈이었으니 흉배가 없는게 맞단 생각이 듭니다.

정조 이후에는 체계금지령이 자리잡아 족두리와 첩지가 일반화되고 왕실 행사에 진짜 머리를 땋아 만든 비싼 대수머리나 큰머리가 아닌 나무 떠구지(순조)가 쓰이기 시작합니다. 신분에 따라 화려한 비녀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가체로 부유함을 증명할 수 없으니 비녀를 비롯한 머리장식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죠. 혜경궁 홍씨는 1735년에 태어나 순조때까지 살았으니 가체부터 족두리, 첩지를 모두 이용하며 당의가 궁중 복식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함께한 여인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청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궁중 복식 고증의 모든 걸 보여주는 여인인 셈입니다.

퓨전이 국적불명의 첩지를 쓰는 핑계가 될 순 없다. 시청자들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극 고증.

 

가체 이외에도 적의, 활옷, 원삼, 스란치마, 대란치마, 무늬 등 궁중 복식에는 의외로 까다로운 시대고증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전에 모 케이블 사극에서 세자빈이 임금이나 쓰는 흉배를 쓴다며 시청자들에게 지적받는 걸 보면 시청자들의 지식 수준은 나날이 높아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각종 댓글이나 시청자의견을 보면 전문가 만큼이나 정확하게 고증을 지적하고 토론하는 모습도 볼 수 있죠. 그러나 TV 사극의 고증 수준은 혜경궁 홍씨 하나를 두고도 이렇게 방향이 갈라지니 TV가 시청자를 전혀 따라오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어쩐지 궁중복식에 대해선 계속 이야기가 나올 것같단 생각이 드네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