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교양있고 조용하던 한 여성이 남편의 불륜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모습. 불륜과 부부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식상할 정도로 자주 연출됩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건 드라마니까 그리고 드라마는 현실 세계 보다는 감정 표현이 격해야하니까 그렇게 과장된 모습이 나오는 거라 믿지만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마주친 모습이 더욱 무시무시했던 것같습니다. 사람 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고 반응도 각각이지만 평소에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만은 확실하죠.
각종 주부 게시판이나 '사랑과 전쟁' 관련 기사에는 불륜과 외도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 자주 올라옵니다. 70, 80년대에 자주 보던, 불륜하는 상간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도둑X'이라고 욕하는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요즘은 폭행죄 무섭죠) 직장과 사회에 알려 망신을 주고 다시는 얼굴 못 내밀게 해야한다는 내용의 무서운 글은 자주 올라옵니다. '불륜하는 X들은 죽여야한다'는 살벌한 말도 있고 당해보지 않으면 아내의 심정을 알 수 없다는 - 다분히 글쓴이 자신의 경험이 섞인 듯한 댓글도 있습니다.
예전에 이웃 아주머니가 흥신소에서 제공한 불법 프로그램 사용법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아주머니 남편의 사업은 부도 직전이고 아주머니는 험한 일로 생활비를 버는 중이었는데 그집 아저씨는 꽤 여러 명의 여성과 바람이 난 상태였다고 합니다. 없는 살림에 흥신소에서 구한 추적기를 몰래 붙이고 남편이 어디 있는지 확인은 해야겠는데 프로그램은 작동을 안하고 급한 마음에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아주머니의 눈빛은 이미 이웃에 대한 창피함과 남에게 부끄러운 불법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 따윈 잊은지 오래였습니다.
반쯤 넋이 나가 프로그램 사용법을 알려주는 저는 잊은 듯한 아주머니는 어떻게 봐도 의부증에 걸린 전형적인 중년 여성같았습니다. 평소에 조용하고 무뚝뚝하던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던 그 순간 놀랍게도 정말 그댁 남편의 차가 모텔에 있는 걸로 확인이 되더군요. 아주머니는 맹목적으로 남편의 위치를 찾아헤매던 처음과는 달리 긴장이 풀린 듯 아예 딴 생각에 빠져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번 배신당했지만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는 듯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는 불륜으로 힘들어하는 주부들과 자신이 직접 유부남의 상간녀가 되어 괴로워하는 나은진(한혜진)이 등장합니다. 은진의 상간남인 재학(지진희)의 아내 송미경(김지수)은 흥신소를 통해 남편이 불륜 증거를 보고받고 은진의 쿠킹 클래스에 참가하는 등 은진의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진은 '단체 기합', '감옥'같은 말이 적힌 협박 편지를 받고 불안에 떨며 자신의 뒤를 밟는 사람 때문에 무서워하고 혹시 아이가 유괴되지 않을지 전전긍긍합니다.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유재학은 자신이 협박당하고 있다는 은진의 알림을 듣고 자신의 차속에도 흥신소에서나 쓰는 추적기가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뒤를 미행하는 차량이 있음을 알고 일부러 접촉사고를 일으켜 정체를 알려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미행을 붙인 사람이 설마 아내일까 의심했지만 차량용 블랙박스에 녹음된 아내 미경의 음성을 듣고 재학은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학은 결혼 생활 내내 완벽했고 한번도 자신의 일을 게을리한 적 없는 아내 미경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송미경은 재학을 향해 울부짖고 서재의 물건들을 모두 부수고 나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나도 몰랐다며 '왜 사람을 이렇게 후지게 만드느냐'고 소리지르죠. 사회적 체면 따위 모두 잊어버리고 여기저기 찾아헤매던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송미경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버린 것입니다. 결혼 생활 20년, 어떤 사람들은 그쯤 되면 배우자에 대한 뜨거운 사랑 따윈 모두 사라지고 정으로 살게 된다고 하던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을 놓아버릴 만큼, 배우자의 불륜은 마치 신경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듯한 그런 고통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론 유재학의 뒤를 미행하고 나은진을 협박한 인물은 송미경같죠. 송미경은 은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과 만나는지 감시하면서도 가끔 멍한 표정으로,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죽고 싶어요'라는 말을 내뱉는 은진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은진씨 좋아하지 않는다'는 직설적인 말에도 붙임성있게 송미경을 따르는 은진은 남편의 불륜녀만 아니라면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 있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불륜의 상처로 고통받았음에도 다른 남자와 바람피웠단 사실을 송미경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추적기를 설치한건 미경이 맞지만 은진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고의로 김성수(이상우)의 차를 들이받아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송미경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행의 미스터리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은진을 볼 때 마다 미워서 어쩔 줄 모르고 흥신소에서 보내준 불륜 사진을 보며 눈물흘리는 미경은 남편에게 퍼붓기 전까지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잘못은 니들이 했는데 왜 내가 고통받아야 되니'는 그녀의 말은 지금의 상황을 되짚어보는, 미경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사였죠.
유재학은 지금 송미경이 나은진을 협박했다는 생각에 더 큰 실망을 합니다. 은진은 은진대로 자신의 처분을 재학의 아내에게 맡긴다며 잠정적으로 두 사람은 가해자가 미경이라 믿는 셈인데 아무래도 은진에 대한 협박은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극중에 은진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영경(김혜나)과 지혜(손화령)는 인테리어 카페에 올라온 '방배동 상간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카페 회원 중 몇명은 결혼식을 찾아갑니다. 상간녀와 아무 상관없는 그녀들이지만 불륜으로 괴로워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상간녀를 응징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범인은 송미경 보다는 어쩌면 송미경을 대신해 나은진을 응징하려는 미지의 인물 아닌가
싶습니다. 마트에 은진을 쫓아온 남성은 은진의 신변 안전을 위해 재학 쪽에서 붙인 사람인거 같구요(2회에서 미행하던 사람과는 다른 얼굴입니다). 송미경이 협박의 범인이라기엔 지나치게 단순하고 쉬운 구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송미경은 불륜 때문에 망가지는 피해자인 동시에 은진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인물이지만 순간순간 은진을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약해지는 인간적 면모를 보입니다.
극중 등장인물들이 생각하는 불륜의 정의가 다르듯 불륜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각각 다릅니다. 남편과 은진의 불륜을 대하는 송미경의 심리 변화 역시 나은진 못지 않게 중요한 이상 협박 미스터리의 범인이 너무 쉽게, 또 진부하게 밝혀진 감이 있네요. 곁에서 '좋은 일 있는거 같다'는 아리송한 말로 속을 긁어놓는 복수는 어울리는데 유치하게 협박편지나 보내는 건 송미경과 정말 어울리지 않거든요. 어쩐지 은진을 오싹하게 하는 또다른 미스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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