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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남주나, 볼수록 괘씸한 자식들의 사실혼 계약서

Shain 2014. 2.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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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작고하신 故 박완서 작가는 늦게 데뷰한 만큼 나이게 맞게 노년층의 감정과 추억을 다룬 소설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혼자된 노인의 섬세한 감정을 꼼꼼하게 묘사한 내용에 감히 내가 읽고 평가할 글은 아니구나 하면서도 역시 나이에 따라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게 다르다는 걸 절실히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식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왜 노인에게 서운하게 구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지만 나날이 약해지는 몸과 마음이 그 섭섭함을 감당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박완서님의 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 박완서 작가가 1984년 발표한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란 제목의 단편소설 이 있습니다.

정현수와 홍순애는 자식들이 가져온 사실혼 계약서에 분노한다. 양보한 것도 몰라주는 괘씸한 자식들.

 

그 소설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성남댁이란 할머니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로 성격이 괴팍한 시아버지를 모시기 싫은 며느리 진태엄마가 성남댁을 시아버지의 간병인으로 데려갑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성남댁 할머니에게 13평짜리 작은 아파트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진태엄마. 성남댁은 아파트도 아파트지만 외롭고 딱한 노인을 성심껏 수발들었습니다. 중풍이 든 노인은 몇년 뒤 세상을 뜨고 말았죠. 그러나 성남댁을 흉보고 남들 앞에서 시아버지를 잘 모신 효부인척 가식을 떨던 진태엄마는 아파트를 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황혼의 동거가 어떻게 끝나는지 제대로 보여준 나쁜 케이스였습니다.

그 나이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젊은 세대는 잘 모르지만 젊을 때는 젊다는 자신감 하나로 어떻게 되든 될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혹은 한순간의 객기로 결혼을 선택하기도 하고 버텨낼 능력만 있다면 나름대로 잘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이들수록 결혼 특히 재혼이 나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죠. '사랑해서 남주나'의 정현수(박근형)나 홍순애(차화연)처럼 어느 나이가 되면 자식들 입장을 생각해서 결혼 욕심을 버리기도 하고 귀신 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세상 물정도 나름대로 잘 압니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진태엄마라는 약아빠진 며느리가 자신 보다 한참 어른인 시아버지와 성남댁을 함부로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지가 자식들 아니면 수발들어줄 사람이 없는 불쌍한 노인이라는 것, 그리고 시장바닥에서 장사하던 성남댁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늙고 나이들어 젊은 자식들 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울 때도 있고 부모라는 이유로 양보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자식들은 부모 보다 힘이 넘치고 살아갈 날이 더 남았다는 이유로 나이든 사람들의 욕망을 조율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합리화 하기도 하죠.

자식들에게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겠지만 그걸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건 별개의 문제.

물론 바람핀 아버지와는 별개로 엄마가 힘들게 번 재산과 엄마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유진(유호정)과 유라(한고은)의 입장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분명히 정현수도 자신이 바람피웠다는 과거 때문이 아니라도 자식들에게 엄마의 흔적을 남긴다는게 왜 중요한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홍순애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병주(서동원)와 지영(오나라)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들 관점에선 홍순애가 집안좋은 정현수와 결혼했다가 혼자가 되면 얌체같은 딸들에게 박완서의 소설속 할머니처럼 버림받지 말란 법이 없죠.

강성훈(김성수), 송미주(홍수현)와 정재민(이상엽)은 재혼을 계산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두 분이 좋으시다면 그냥 결혼하게 해드리자고 합니다만 자식들은 기어코 괘씸하게도 부모 앞에 사실혼 계약서를 들이밀고 맙니다. 한쪽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지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계약결혼을 강요 하고 나머지 한쪽은 자기들 몫이 되어야할 재산과 현실적인 잇속을 채워야한다는 얍삽한 생각에 자신의 어머니를 아파트 한채받고 정현수의 수발드는 여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감정적인 이유든 속물적인 이유든 자식들의 합의는 무례했습니다.

가망없어 보이던 송호섭 부부도 미주의 결혼 앞에서 철이 드는데 병주 부부는 왜 아직 그대로일까.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 결혼의 형식을 깨고 파격적인 동거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결혼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혼전계약서나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스스로 그런 조건에 합의하는 것과 남이 그런 조건을 강요하는 것은 천지차이 입니다. 결혼하시고 싶으시냐는 질문에 진지하게 상의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행동도 옳치 않지만 마치 반려동물 분양계약서처럼 보이는 이상한 사실혼 계약서를 들고 부모를 대하는 그들은 부모의 인생이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듯합니다. 한쪽은 예의 바르고 한쪽은 노골적이라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물론 주책맞게 나이먹어서 동남아에서 아가씨를 사오겠다는 노인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식들의 수발을 받는 처지면서 과욕을 부리는 어른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만 정현수와 홍순애의 상황은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자식들이 개입하기 힘든 경우죠. 유진과 유라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쳐도 자식들의 욕심을 위해 비인간적인 계약서를 들이민건 틀림없이 잘못된 처사 입니다. 잔머리를 굴리며 시부모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병주 부부의 속셈도 야단을 맞아야할 문제구요.

함께 할 시간도 짧은 홍순애, 정현수. 자식들에게 어떤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홍순애가 전남편 부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부처가 따로 없다 싶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송호섭(강석우)이 미주의 상견례 자리에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아버지가 맞긴 맞다 싶고 약간은 주책맞아보였던 연희(김나운)도 말귀는 알아듣는 사람같습니다. 자식이냐 회사냐 선택하라는 남편 은희재(최정우)의 말에 갈등하고 결국 가족이란 이름으로 은하림(서지석)을 품는 이혜신(유지인)도 따끔안 아픔 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죠. 그러나 한없이 퍼주고 싶었던 대상,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싶었던 자식이 이렇게 나올 땐 어떻게 따끔하게 혼내야하는 걸까요?

홍순애는 자식들을 위해서 전남편에 대한 자존심을 접고 미주, 병주를 길러준 연희와 송호섭에게 사업자금을 대주었습니다. 정현수는 자신이 딸들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기에 굳이 홍순애와 결혼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연륜있는 어른으로서 양보했던 자존심이고 포기했던 행복인데 자식들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 습니다. 노년의 사랑은 그래서 참 힘겹습니다. 정현수는 '자식들 눈치만 봤다'며 결혼을 선언했고 홍순애는 병주에게 '내가 죽기전까진 한푼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유진 자매와 병주는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될 수 있을까 - 그 과정이 흥미로울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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