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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2부까지 가지 못한 그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Shain 2014. 2. 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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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야 상상하기 힘든 곤란이겠지만 70, 80년대에는 쌀이 떨어져 굶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이른 나이에 직장을 다니게 된 청소년들과 어려운 살림에 힘겹게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생활비가 똑 떨어져 고생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지요. 넉살좋은 사람들은 잘 알고 지네던 동네 수퍼에 가서 라면이라도 하나 외상으로 받아먹고 나중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가 생겼을 때 갚곤 했다고 하더군요. 요새는 그런 동네 수퍼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고 마음놓고 외상줄 수 있는 단골 보다 뜨내기가 더 많은 현실이니 옛날이야기죠.

힘겨운 사회분위기 덕에 김재희를 누르고 미스코리아 진이 된 오지영. 그러나 그녀 앞에 김형준은 없었다.

현대사회는 1등 아닌 2등은 필요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두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사회라고도 하죠. 지금 보다 더 꼬질꼬질했고 덜 편리했고 경제적이지 못했던 과거의 인심. 그 시대를 겪어본 사람들이 외상장부를 떠올리는 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반전을 꿈꿀 수 있었던 가능성 때문일 것입니다. 동네 수퍼 아저씨의 인심에 라면 한끼로 배를 채우면 막일을 하든 어쨌든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수퍼들은 90년대부터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90년대 후반에는 대형 창고형 할인매장이 자리잡기 시작했죠.

'미스코리아'의 오지영(이연희)은 끝끝내 미스코리아 진의 왕관을 거머쥐었습니다. 첫사랑 김형준(이선균)과 함께 사랑도 미스코리아도 2부까지 가겠노라 약속했건만 김형준은 깡패들의 협박과 기업사냥꾼 이윤(이기우)의 음모로 대회장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오지영은 비비화장품 사람들로 채워져야할 객석이 텅빈 것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미스코리아 행사장에 가지 못하고 길거리 TV로 오지영을 지켜보는 이선균의 슬픈 눈빛이 참 가슴아팠죠. 그렇게 원했던 미스코리아 진인데 펄펄 뛸듯이 기뻐야 하는데 오지영의 눈앞에 형준이 없습니다.



 

 

 

오지영의 미스코리아 대회는 97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모두 52명의 후보가 본선에 올라 경합을 벌였지만 본상을 수상하는 사람은 단 15명 뿐이고 그중에서 끝까지 남아 카메라를 차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2부에서 탈락한 나머지 37명이 무대 뒤에서 울며 불며 짐을 싸고 떠나도 시청자들은 모릅니다. 국민들이 기억하는 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경직된 입으로 웃고있는 미스코리아 진 단 한사람 뿐 이죠. 2부까지 가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2등이 된 김형준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처지에서 오지영을 지켜본다.

드라마속 미스코리아 대회는 90년대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김형준과 그의 친구들은 획기적인 상품을 개발해 성공하겠다는 꿈을 꿨지만 경제위기로 사채를 빌렸고 이제는 그 돈을 갚지 못해 그들이 개발한 비비크림 마저 남에게 빼앗길 처지입니다. 친구라고 믿었던 투자자는 확실하게 뒷통수를 쳤습니다. 엘리베이터걸 오지영은 어렵게 살아남았지만 비비화장품 식구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쟁쟁한 화장품회사들의 경쟁을 뚫지 못하고 2부까지가지 못한 그네들은 깡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쓰러집니다. 그 시대의 실패한 젊은이들에게 쉽게 재기할 기회가 주어질까요?

90년대 후반에 나타난 벤처기업들은 여러모로 사회 분위기를 확 바꿔놓습니다. 정장과 구두를 입고 출근하던 회사원들의 패션이 청바지와 운동화, 티셔츠가 되었고 합리와 실리를 추구하던 그들의 직장문화는 점잖은 사장님과 경직된 회사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함께 아이템 하나만 믿고 출발했던 벤처기업들 중 다수가 사업을 접습니다. 미스코리아 본선 탈락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의 벤처기업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겠죠.

본선 15명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은 2부까지 가지 못하고 그대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간다.

끝까지 살아남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오지영과 냉정한 현실에 좌절해 씁쓸하게 웃고 있는 김형준의 모습이 대조적 입니다. 성형수술과 돈으로 점철된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오지영이 1등을 차지한 건 순전히 사회분위기 덕이었습니다. 지난 14회에서 미스코리아 후보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보며 '기호 1번이 질 수도 있다'는 걸 놀랍다는 듯이 이야기하죠. 1번이 아닌 2번에게도 기회는 있었고 누군가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IMF 직격타로 아직까지 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2부에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관대하지 못합니다.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가진 후보'가 진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자연 미인에 가산점을 주면 좋겠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학력좋은 후보 보다 옆집언니같은 친근한 후보에게 점수를 주겠다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김재희(고성희) 보다는 오지영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런 기준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팍팍한 현실은 김형준과 고화정(송선미)이 힘겹게 일궈낸 벤처기업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가 1등이 되기 위해선 누군가는 2등이 되어야하고 2등이 된 사람들은 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었죠.

우리들의 판타지는 2부까지 가지 못해도 끝나지 않는다. 오지영의 당선 소감은 어떤 말이었을까?

물론 '미스코리아'는 드라마입니다. '출퇴근으로 다져진 생활형 근육'을 가진 미스코리아 진 오지영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대회 당일 생일을 맞은 오지영은 나이 제한 시비에 걸려 왕관 박탈 위기를 겪을 수도 있고 박부장(장원영)이 방해할 수도, '지금까지 도와준 비비화장품에 감사한다'는 색다른 우승 소감 한마디로 김형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김대중 정부의 핵심 사업중 하나였던 벤처기업 육성으로 김형준이 또다른 기회를 얻게될 수도 있겠죠.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시청자들을 묘하게 들었다놨다 하는 이 드라마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아무도 2부에 올라가지 못한 그 사람들을 기억해주지 않아도 - 본선에서 탈락한 사람들도, 경제 위기로 명퇴한 사람들도, 벤처기업에서 망하고 오랫동안 방황했던 사람들도 -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구요. 목표를 이뤘다고 해서 그걸로 인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부까지 가지 못했으니까 끝난 거라고 남들이 말해도 그때부터 '에필로그'처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게 우리들의 판타지고 희망 이죠. 미스코리아 당선과 함께 끝날 줄 알았던 이 드라마에 뒷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오지영은 미스코리아 진 당선소감으로 무슨 말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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