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드라마 속 중전과 후궁들 - 단순히 왕에게 사랑받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Shain 2008. 3. 1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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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의 최고 로맨스는 '의빈 성씨'(극중 성송연, 한지민)와 '이산 정조'와의 사랑일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이었겠지만 드라마상 동년배로 설정하여 오래 인연을 맺은 연인으로 등장하는 의빈 성씨는 '수빈 박씨(정조 11년, 1786년 의빈 성씨 사망 후 1987년 후궁으로 간택됨)'라는 인물이 정조의 후계자를 낳기 전 죽은 후궁이다. 이산 정조의 개인사는 비극을 예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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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이산) 이산에서 재탄생시킨 정조 임금과 의빈 성씨. 정조가 후궁으로 선택한 후궁답게 자식을 셋이나 가졌던 의빈이지만 일찍 죽는 운명에 처한다.


소현세자 이후, 왕가엔 후궁을 두어도 세자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저주가 있었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부인과 함께 억울하게 사사된 이후 왕조의 후계자는 정비에게서 거의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주도 저주지만 드라마 이산에서도 묘사되듯 조선 왕조의 중전들은 정략적으로 결정되었고 왕위를 잇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왕이 백년가약을 맺어 사랑을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보면 된다. 정치적으로 멀리해야할 아내가 있는가 하면 사랑했기에 수명이 짧아진 연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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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왕과나) 공혜왕후와 간택 후궁이 된 두 명의 숙의 윤씨. 그리고 자성대비 윤씨와 인수대비 한씨. 인수대비를 제외하고 모두 중전 자리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왕의 사랑을 받아 간택당하는 후궁들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왕조 최고의 바람둥이일 지도 모르는 성종 임금을 묘사한 드라마, '왕과나'에서도 그 풍경은 여전하다. 그러나 자칫 여인들의 싸움으로 보이는 이 후궁의 다툼에 권력관계가 작용한다는 점을 이제는 알고 있다. 후궁도 정략적으로 간택되는 마당에 왕들이 순수한 사랑을 하고 편안한 인연을 맺기란 정말 힘들었다. 또 왕의 사랑을 받았어도 신분이 낮으면 중전이 될 수 없다. 과연 그들의 미묘한 관계는 어떻게 왕가를 뒤집어 놓았을까?


정조가 선택한 정인은 단 한 사람 - 의빈 성씨

이전 왕들에 비해 후궁을 그리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정조는 후사를 낳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효의왕후를 두고 후궁을 얻었다(정순왕후가 간택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궁들이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이다. 중전은 원래 정치적으로 선택된다고 치지만, 원하는대로 얻어야할 후궁 조차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정조는 사랑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인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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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이산) 효의왕후로 출연 중인 박은혜. 왕이 누굴 중전과 후궁으로 뽑아 총애하느냐의 문제는 권력 싸움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효의왕후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원래 화빈 윤씨의 처소 나인으로 알려진 의빈 성씨는 유일하게 정조가 마음에 두고 직접 선택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보잘것 없는 집안에 정치와는 티끌 만큼의 인연도 없는, 의빈 성씨의 집안은 당연히 노론이 아니다. 효의왕후는 노론가의 인물이고 나머지 후궁은 간택 후궁이니 의빈 성씨의 등장이 반가울 리는 없었을 것이다. 정조의 상당한 애정을 받았다는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와 옹주 하나를 낳고 또다른 왕손을 임신 중이었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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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홍국영) 정조와 친하게 지내며 가끔 개혁적 인물로 묘사되는 홍국영은 어린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 홍씨)으로 밀어넣는다. 그 탓으로 혜경궁, 효의왕후와 완전히 척을 진다.


임신한 채로 죽었으니 왕손을 셋이나 잉태했던, 사랑받는 후궁 의빈 성씨는 노론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정파에 강경한 왕인 정조의 후사를 자신들의 혈연으로 두길 바랐던 노론들이 의빈 성씨와 그 자녀들을 죽이지 않았겠냐는 정황이 있다는 것(정순왕후는 의빈 성씨 사후 교지를 내린다고 한다). 노론은 결국 자신들의 뜻대로 정조가 선택한 사람이 아닌 권력이 선택한 후궁이 정조의 후사, 순조를 낳게 하는데 성공했다(후에 수빈 박씨의 집안은 안동김씨의 권세를 나누어 가지게 된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그리고 장희빈

가끔 자신의 남편은 후궁을 하나도 두지 않았다며 시할머니(양주 조씨로 자의대비, 장렬왕후)를 약올렸다는 명성왕후. 그녀 이외에 후궁을 둔 적 없는 왕이 있긴 있다. 단종, 예종, 경종 등 후궁을 둘 새도 없이 일찍 죽었거나 후궁을 두기 보단 목숨잇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이랄까. 경종 경우엔 후사를 둘 수 없는 몸이라는 약간은 악랄한 루머가 돌긴 했지만(장희빈이 경종이 후사를 둘 수 없도록 패악을 부렸다는 야사) '영조'를 밀고 있던 노론들 덕에 오히려 후사를 낳지 않는 쪽을 장려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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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장희빈) 패악을 부리며 죽었다는 기록은 '정사'는 아니라고 한다. SBS의 장희빈은 가장 사랑에 목숨 건 장희빈이 아닐까 싶다. 반면 김혜수의 장희빈은 반면 야망과 사랑을 모두 거머쥐고 싶어한 여인.


이 괄괄한 명성왕후의 남편,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남인과 서인은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엄청난 접전을 치른 바 있다. 대개는 왕이 중립을 지키며 싸움질을 두고 보지만, 그 과정 중 몇몇 당파는 사화를 거쳐 몰락하기도 했다. 숙종 초기엔 서인이 잠시 몰락하고,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명성왕후는 자신도 서인 집안의 딸이었고, 며느리도 서인 집안의 인현왕후 민씨를 들였다(덤으로 집안좋은 서인의 딸, 귀인 김씨도).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싸움이 그토록 치열해진 이유 중 하나는 장렬왕후와 장희빈의 남인, 명성왕후와 인현왕후의 서인이 벌이는 다툼이 목숨을 건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백년이 넘게 이어온 싸움이 '죽지 않고' 끝날 리 없었던 거다. 장희빈이 인경왕후 생시에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후궁을 두지 않은 현종은 사실 부인과 이 궁안의 다툼이 몹시 무서웠던 것 아닐까. 대를 이어 싸운 왕비들과 일개 후궁의 싸움은 장희빈의 사약으로 끝났다. 숙종은 결국 사랑을 했다기 보단 파벌 사이에서 시소놀이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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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장희빈) 덕이 높은 여인으로 칭송되는 인현왕후는 서인 출신으로 어릴 때 중전이 됐다. 숙종을 잡고자 꽤 노력했으나 사랑에 빠진 숙종에게 정치 논리를 내세우는 중전이 예뻐보일 리는 없었을 듯 하다.


숙종도 제법 여자를 가까이 한 타입이다. 다만 서인 측에서 보낸 여성들은 거의 상대하지 않았다고 할까. 숙빈 최씨도 후에 아들을 위해 서인을 따른다고 한다(원래 인현왕후전 궁인 출신, 영조는 귀인 김씨와도 매우 친하다). 숙종은 숙빈 이후에도 후궁을 더 두었다. 장희빈 사후까지 숙종의 칼을 피해 끝까지 살아남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은 또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왕가의 자손들을 저울질하게 된다. 숙종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명을 내린 왕이다(장희빈 덕에 사화까지 치른 인간의 선택이니 당연하겠지만 이  제도에도 문제가 많았다).


조강지처 역할을 하던 여인들을 후궁으로 둬야했던 선조, 영조

선조에게는 빈으로 불리웠던 후궁만 6명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일찍 사망)과 양화당으로 유명한 인빈(무려 4남 5녀를 낳았다)은 거의 조강지처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는 의인왕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공식적으론 후사 문제로). 특히 선조가 명종비에게 후궁으로 추천받았다는 양화당, 인빈 김씨는 의인왕후와 동갑이다. 성격이 온화하고 광해군과도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 인빈은 꽤 많은 후궁을 두었던 선조 임금의 인목왕후 간택으로 중전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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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왕의여자) 선조와 인빈의 관계는 명종시절부터 이어진 조강지처같은 것이었다. 의인왕후 박씨는 후사가 없어 광해군을 아들로 여겼지만 인빈은 무려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영조 임금 역시 조강지처인 정성왕후 서씨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서씨는 소론의 인물, 사도세자는 정성왕후를 따랐다고 한다) 대신 궁녀 출신인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선희궁)를 총애하게 된다. 정빈과 영빈에게서 각각 세자 한 명씩을 얻었지만, 정빈의 아들은 일찍 죽고 영빈의 아들은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된다. 영빈은 거의 궁의 안살림을 알아서 했지만 궁녀 출신으로 신분이 낮은데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후궁을 중전으로 올리지 못하게 한 까닭에 정성왕후 사후에도 중전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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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홍국영) 영조가 중전을 멀리 하고 사랑한 두 후궁. 그 두 후궁이 낳은 아들은 모두 죽고 후궁을 닮은 옹주들은 영조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비상식적인 화완옹주의 권력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영빈 이씨, 숙의 문씨, 그리고 정순왕후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음모론은 유명하다. 선조의 나이어린 왕비 인목왕후, 영조의 나이어린 왕비 정순왕후. 두 사람은 왕의 정략적인 왕비인 것 이외에 '윗어른'이란 명분으로 정통 왕위 계승자들을 위협한 왕비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왕의 실질적인 '아내'들은 다 따로 있지만 정략 결혼 본연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했다고 할까. 두 왕후는 인조반정과 세도정치라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조선왕조에 악영향을 끼쳤다.


성종에게 사랑받은 후궁들은 따로 있다 - 명목상의 왕비들

성종의 첫째 부인은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이다. 성종은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정치적 이익이 맞물려 형과 사촌형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왕이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후궁을 들였던 성종은 조선 왕조 최고의 바람둥이란 별명이 있다. 또 나이가 어리고 어머니와 할머니, 장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탓에 초기 왕권이 약했다. 부인 만 12명에 자식이 16남 12녀라는 성종은 비슷한 시기에 윤씨성을 가진 후궁을 둘 간택한다. 한명이 폐비 윤씨(제헌왕후)이고 또 다른 한명은 정현왕후 윤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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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왕과나) 정치적인 정희왕후와 폭빈이란 별명을 가졌던 인수대비. 궁내 권력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특정 권력이 지지하는 중전을 둘 수 없었던 성종. 폐비 윤씨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정희왕후는 자신의 집안인 후궁 윤씨를 중전으로 올리고 싶어한 것으로 보이나 친정조카뻘인 윤씨는 입궁 당시 12살 밖에 되지 않았다. 정희왕후나 인수대비의 합의에 어울리는 중전 후보지만 너무 어렸다. 폐비 윤씨는 임신을 한데다 양반 가문 출신으로 승은 후궁인 엄씨나 정씨(천민으로 알려짐) 보다 신분이 높았다. 또 두 대비에겐 외척이 강하지 않은 중전을 자리에 올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성종 임금도 왕권을 위해 특정 가문의 아내나 후궁을 총애하진 않았으리란 짐작이 가능하다. 자신의 바람기 때문 만이 아니라 권력 집중 문제를 봐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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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왕과나) 폐비 윤씨는 6년 정도 궁에 있었다. 힘의 배분, 그리고 성종의 바람기를 고려할 때 윤씨가 사랑받는 여인으로 살고 싶었다면 중전은 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정치적 이점이 맞아 떨어져 중전이 된 폐비 윤씨는 그 이후엔 인수대비와 정희왕후, 그리고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과 성종을 모두 요리할 만한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왕비가 되기 위해 입궁한 정현왕후(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잘 알았던 것 같다)에게 중전 자리를 '물려주는' 신세가 되고 만다. 성종에겐 명빈 김씨와 숙의 홍씨란 후궁도 있는데 그다지 실록이나 성종의 스캔들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숙의 홍씨는 성종의 자녀를 10명이나 낳았다. 몹시 사랑받았지만 신분이 낮아 죽지도 않았고, 무탈하게 잘 살았다. 성종에게 가장 사랑받은 여인은 어쩌면 이 뒤에 숨은 후궁들이 아닐까.


중종의 팔선녀는 노골적인 권력의 압력

그리 좋아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태종 이방원이 외척이 득시글거리는 꼴을 보기 싫다고 세종의 외척이 될만한 사람을 모두 죽여 버린다. 그 영향을 받아 세종이 '단종'의 후견인이 될만한 왕족을 아무도 세우지 않고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연산군 이후 외척의 발현 보다 더 무서운 건 왕을 갈아치우는 신하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대부와 왕권의 싸움이 시작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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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여인천하) 신씨를 쫓아낸 중종에게 8명의 후궁을 밀어넣는 것도 꽤 잔인한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언제 내칠 지 모르는 공신의 딸들을 말이다. 창빈(추존)은 팔선녀로서 입궁한 후궁이 아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곧 연산군이 폐위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정현왕후(자순대비)의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에 즉위할 것이다.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세력들은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를 내치고 자신들의 딸들을 중종의 후궁으로 줄줄이 밀어넣는다. 이 정도 인원이면 적당히 잘 골라줬으니 우리 세력권 내에서 중전을 고르란 뜻이렸다. 그 인원이 여덟이나 되어 팔선녀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이 상황은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묘사된 적 있다). 자순대비는 중전이 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이진 않아도 간단한 정치는 아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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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여인천하) 신분이 좋아 중전이 된 윤임의 누이, 장경왕후는 팔선녀 덕에 일찍 죽었다는 말이 있다. 집안세력이 약했던 문정왕후는 파워 게임 때문이라도 대비와 왕의 옹호를 받게 되는 셈이다.


자순대비는 그 세력을 견제하는 의미로 인종을 낳은 파평 윤씨(자순대비도 파평 윤씨)가 죽자 두번째 계비 역시 파평 윤씨 집안에서 골랐다. 명종의 어머니인 그 유명한 문정왕후이다. 팔선녀의 집안이 워낙 쟁쟁한(경빈 박씨는 잘 알려졌듯 박원종의 양녀이고 희빈 홍씨는 홍경주의 딸) 것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집안의 어린 딸을 골랐다. 그러나 문정왕후 윤씨는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까지 동원해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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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대장금) 대장금에서 승은후궁, 숙원 이씨로 출연한 연생. 중종에게 숙원 이씨는 두 명이다. 그리고 두 명 모두 간택 후궁으로 팔선녀라고 한다.


그 살벌한 궁궐 전쟁터에서 정권을 잡은 문정왕후도 대단하지만(문정왕후는 악행으로 더 유명하지만, 왕권 VS 신권의 부분에선 승자가 아닌가 싶다) 권력 싸움 틈에 사랑하던 경빈 등을 처벌했어야 했던 중종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파워풀한 군왕의 시대는 연산군 때 종료했던 게 아닐까. 드라마 '대장금'에서 중종의 사랑을 받아 첩지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 '숙원 이씨(연생이)'도 팔선녀로 입궁한 후궁이다. 아내를 내친 중종에겐 선녀들이 많아도 천국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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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이란 이름으로 왕의 사랑을 받은 여인들. 왕을 연인으로 두었기에 가끔은 목숨 조차 보전하기 힘들었던 그들의 인생을 이젠 드라마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참고 출처 :
네이버 뉴스 - [이한우의 조선이야기] 비극의 역사 왕좌를 빼앗긴 왕자들
네이버 백과사전 - 명성왕후 김씨
네이버 백과사전 - 장렬왕후 조씨
네이버 모자이크 - 왕의 후궁들
네이버 뉴스 - [포토]박은혜, "효의왕후로 돌아왔어요"
http://www.imbc.com/broad/tv/drama/isan/wallpaper/
http://www.imbc.com/broad/tv/drama/daejanggum/staff_note/index.html
SBS 왕과 나 - 포토갤러리
스타뉴스 - '연산군' 정태우, 카리스마 작렬
네이버 뉴스 - ‘이산’ 시청률 20%선 무너져… ‘왕과나’ 선두 유지
네이버 포토 앨범 - 홍국영

* 기억에 의존해 쓰다 보니 명칭 때문에 네이버를 자주 뒤지게 됩니다. 특히 존호를 '왕후'로 통일하려고 애쎴지만 생전에 쓰던 '대비' 존호를 섞어서 쓰게 되는군요(아무래도 살았을 적 일이니까). 참고로 명성왕후에게 헌렬대비란 존호도 있습니다. 그리고 후궁들의 첩지가 '명빈 김씨'로 표기됐더라도 후에 추존된 경우(숙종 시대의 귀인 김씨는 후에 영빈 김씨로 품계가 올라갔단 사실이 잘 안 알려져 있습니다)는 상당히 헷갈리더군요. 그리고 명성왕후 찾으면 명성황후로 검색 결과가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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