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판타지 사극 '선덕여왕'의 미실이 악녀가 되어야하는 까닭?

Shain 2009. 6. 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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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정치감각이 뛰어난 그녀가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땐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였다 한다. 그녀가 드라마에 등장했다. 무수한 퓨전 사극 주인공들처럼 아직 어린시절을 중국에서 구르고(?) 있는 그녀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건 화랑세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10년이 넘었다. 위서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으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단 이야기도 그때 읽었다. 그 속에 그려진 신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알던 모습과 몹시 달랐다. 그때는 충격적인 역사서라 오래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역사 교과서 속의 내용을 모두 뒤집을 만한 이야기가 실린 '화랑세기'. 필사본이기에 박창화씨의 덧붙임이 있으리라는 추측(신라 비석은 왕의 이름을 마립간, 왕, 대왕 등으로 기록하나 화랑세기는 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이 있긴 해도 월성 해자의 존재 등을 정확히 기술한 화랑세기는 이제 역사서의 일종으로 인정받을 듯하다.


비담, 미실, 선덕여왕, 김유신, 천명공주, 김춘추 등 역사서 속 신라 인물이 함께 하는 MBC 선덕여왕.



각각의 구절을 해석해 정설을 새로 추정해야겠지만(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이 유교적인 까닭에 대조 어려움이 더 큰 듯) 이미 최근 방영 중인 MBC TV의 '선덕여왕(2009)'은 필사본을 기반으로 드라마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가짜 논란이 되는 사서에서 태어난 '색다른' 캐릭터라니 화제의 판타지 사극 출현이다. 요즘은 정통 사극이란 이름이 의미를 잃은 시대다.

'판타지 사극'이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최근의 퓨전 사극들을 부르는 개인적인 별명이다. 역사에서 모티브만 차용한 환상적인 사극들은 상당히 많다. 'MBC 주몽(2006)'을 비롯한 'KBS 바람의 나라(2008)', 'SBS 자명고(2009)'등이 판타지 사극의 계보를 이었다. 절대 동년배가 될 수 없는 김처선, 성종, 폐비 윤씨를 또래로 설정한 'SBS 왕과 나(2008)'는 조선 왕조 판타지 사극의 절정이 아닌가 싶다.


화려한 조연급 연기자들의 연기와 분장에도 현대극 스타일을 고수하는 판타지 사극 자명고(SBS)



대나무가 배경으로 나오는 고구려 드라마, 열대에서만 자란다는 난이 나오는가 하면 삼국시대 이전에 감자와 개망초가 등장하고 명나라 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채꽃밭을 달리는 사극에서 '판타지'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건 솔직히 무리일 것이다. 고증은 상당히 컨셉 차원의 문제고 오락거리인 드라마를 보며 역사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역사서가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 '드라마' 역시 오락거리를 위한 조작이 될 수 밖에 없다.

드라마 선덕여왕 역시 'The Tudors(SHOWTIME, 2007)'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서를 인용한다. 미실이 강성했던 시기와 선덕여왕이 활약했던 시기는 대체로 맞물리지 않는다. 선덕여왕이 어른이 되었을 즈음엔 미실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자라는 동안 진평왕은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용수, 용춘을 번갈아 딸들과 맺어주며 후사를 두려 노력했다. 선덕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애인만 바꾸고 갈아치우던 기간인 셈.


대원신통의 후계자 미실은 미실궁주라 불리던 왕족이었고 색공지신이었다. 또 국정에 관여하는 신하로 원화의 역할을 수행하고 화랑의 통수권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국선 문노와 미실의 관계(문노는 올곧은 성격이고 설원랑과 대립각을 세우긴 하나 정치적으로 미실과 협력하는 부분이 많았다), 진평왕과 미실의 관계(색공을 받아야하는 관계로 미실과의 사이에 딸이 있다), 후에 선덕여왕 시대의 신하로 등장하는 칠숙(반란을 꾀한 아찬)이나 을제(후에 여왕을 섬긴다고 표현됨)의 설정 등등은, 편리한대로 배치되어 있다. 드라마로서는 상당히 극적이고 훌륭한 인물관계이다.

개인적으로 '미실'이란 인물이 어떻게 표현되는 지 꽤 오래 궁금했다. 드라마란 종종 자극적인 소재들을 그럴듯하게 선사하는 오락수단이고 보면 역사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들, 그러나 사서에서는 지워지는 소서노, 낙랑공주, 미실 들이 드라마로 재탄생되는 모습을 기대해보곤 한다. 최고 권력자로 다수의 남편을 둔 것으로 짐작되는 소서노가 일편단심으로 그려지는 모습을 보며 '남편들'을 일부종사시킨 미실같은 여자는 TV에서 보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왕이 후궁을 두듯 왕에게 색공을 바치면서도 여러 남자를 자신의 곁에 둔 미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가치관의 여인이다.



화랑세기를 읽을 수록 느끼게 되는 것, 그건 신라가 중국식 문화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이다. 모계 중심의 가문이 유지되며 왕에게 왕후를 제공하며 색공을 바치는데 계급 간의 구분이 철저한 신라 왕위 계승권자들은 그녀들 이외에는 취할 수 없는 골품제 속에 살고 있었다. 남매 간의 결혼이나 근친 간의 혈족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고대부터 이어진 전통으로 보인다.

법흥왕 때부터 강조된 성골 골품은 왕의 직계 혈족들로 왕위를 이었고, 방계의 왕족은 자신들끼리 진골의 골품을 이루어 나갔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왕족과 맺어지는 여인들의 가문이다. 김유신 같은 가야 왕족 출신은 진골이라도 배제되곤 했고 김춘추는 골품이 달라 본래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 미실은 그 가운데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린 궁주이다.

천명공주, 덕만공주, 선화공주(확실치 않다)의 아버지인 진평왕. 미실과 대립하고 성골을 잇기 위해 꽤 고심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실제로는 강력한 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초기엔 신관 성격의 사제를 두고(주로 여성이었던 듯하다 - SBS 연개소문의 미실은 신관과 관련있는 듯 해석된 걸로 기억) 있었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원광법사와 화랑에 의해 부흥한 불교로 인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고(진흥왕 시기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중국을 건너는 학자들에 의해 근친혼 등을 꺼리는 풍조가 생겨나 전통을 고수하는 왕족들과 대립되곤 했다.

애초에 유교 중심 가치관을 가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이들 사회의 가치관이나 문화를 해석하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미실 이전부터 신라 왕실을 좌지우지하고 색공을 통해 권력을 얻고 후계를 잇던 강력한 여인들, 지소태후나 사도왕후의 존재는 무시되어 버린다. 중국식 문화에 대응하는 그들의 화합과 정치 능력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낭장결의 장면 자체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화랑이 곱게 분장했다는 기록은 있다(전투 전에도). 여성이 제사를 지내던 고대 전통과 맞물리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KBS 삼국기(1992)'라는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제외한 여성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랑세기가 주목받은 이후 거의 10년, 김별아의 소설 미실은 화랑들과 왕 그리고 미실의 사랑을 그렸다. 그 이후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미실 역시 남자를 휘하에 두고 국정을 휘두르지만 정치적인 정점에 선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의 그녀가 악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권력을 누린 미실의 통치 능력은 꽤나 탁월하지 않나 생각한다. 조선 시대 관점으로는 후궁이 정치에 관여함을 횡포로 볼 수 있지만 신라시대엔 후궁도 한 사람의 신하였으니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틱한 설정이 필요한 판타지 사극이라 미실이 악녀가 된 것이라 보긴하지만 한편 오직 왕만이 왕위를 잇는 것을 정당하다 보는 유교 가치관이 TV를 채운 건 아닌지. 그래서 도전적인 미실의 모습은 악녀가 되버리는 것 아닐까.


공리가 춤추며 사기 대접을 두드리던 영화 '진용'이 떠오르는 장면. 신라 유물 중엔 여러 색의 유리 그릇과 유리병, 유리잔이 자주 출토된다.



로마국에서 넘어온 유리그릇에 술을 붓고 석빙고에서 꺼내온 얼음을 띄워 마시는 여름. 신라 유물엔 실제 꽤 많은 유리그릇과 금장 장식품들이 등장한다. 그 어느 시대 보다 풍요롭고 화려했던 그들 만의 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왕족 여인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아니었다면 선덕여왕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니 굳이 미실이 마녀가 될 까닭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삭제된 여인, 미실. 완벽하진 않지만 새롭게 탄생한 그녀가 '에로틱'만을 강조한 모습이 아닌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예전에 실망했던 배우가 주연급임에 기대가 반감해도) 나머지 배우들이 꽤 볼만한 '볼거리'를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그나마 선덕여왕의 정치 능력은 '사람을 얻는 여왕'으로 최대의 평가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 국제신문에서 연재했던 '다시쓰는 화랑세기(조해현 기자, 24편에 걸쳐 연재)'를 추천한다.


* 미실의 사랑을 다룬책 : 김별아의 '미실'
미실(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별아 (문이당,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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