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개국 초기 자신들의 역성혁명이 정당했음을 기록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고려는 우왕의 실정으로 국고가 텅텅 비었고 국내외적으로 어려웠지만 백성들은 귀족들에게 수탈당하고 왜구와 홍건적이 침입하는 국내 정세 때문에 조선 왕조의 개국을 무작정 환영할 수 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이론에 조금씩 차이는 있습니다만 사대부들에게 '충성'은 통치의 중요 덕목 중 하나입니다. 백성에게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서 모범을 보여야할 지배세력이 '역성혁명'을 일으켰을 땐 그에 합당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했죠. 그 덕분에 우왕과 창왕은 왕씨 집안의 정식 후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신씨가 되었습니다. 신우와 신창, 시호도 주어지지 않고 이름으로 불리는 왕입니다.
건국 세력의 반대파이자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최영을 참수했지만 민심 때문에 그를 간신으로 기록하지 못하고 이방원의 손으로 직접 살해한 정몽주를 충신으로 묘사해야했던 이유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왜적을 무찔러 국민적인 존경을 받던 노장 최영을 굳이 간신으로 만들어 민심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으며 '충성'이란 덕목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정몽주가 그들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던거죠. 그들이 쓴 조선 건국 시나리오는 이랬습니다. 훌륭한 신하들이 있으나 왕은 부덕했고 이성계는 천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위화도에서 회군했노라.
드라마 '정도전'에서 드디어 이성계(유동근)가 회군을 실행했습니다. 자세히 기록된 역사서가 있는 만큼 타고난 무장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이란 반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과정과 아무리 요동으로 가려 해도 발길을 개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자연재해 즉 폭우가 위화도 회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조는 거의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때를 기다리던 영웅이 회군을 기회로 마음을 다잡는 과정을 묘사하던 '용의 눈물(1996)'과 최영(서인석)의 전언을 듣고 절대로 회군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이성계(유동근)가 부하장수들의 간청에 총대를 매는 묘사는 많은 부분 비교되더군요.
특히 조민수(김주영) 장군이 대세가 최영이냐 이성계냐 따지면서 줄을 잘 서야한다고 말했던 장면은 역질과 폭우 때문에 희생되는 군사들을 위해 이성계(당시 김무생)에게 혼자서 칼을 바치는 조민수(박종관)와 비교되죠. 이것은 공여군 장군들이 회군의 책임을 이성계에게 '떠넘겼다'는 뜻 입니다. 크게는 언제 역성혁명을 결심했느냐를 두고 설정의 차이를 둔 셈이지만 단 한가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하늘이 요동정벌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부분입니다. 요동정벌에 동원된 장군들은 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고 군사들이 지치고 쓰러져 어쩔 수 없이 회군에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대업은 하늘이 정한 필연이자 천명'이라는 정도전(조재현)의 말처럼 나라를 세울 운명이라는 꿈까지 꿨다는 이성계가 정말 조선을 건국할 운명을 타고났는지 아니면 이인임(박영규)의 인척이 되어 고려에서 승승장구하려다가 위화도 회군이 절대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 판단하고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린 것인지 그것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출세하고 싶은 야망에 불타던 장군 이성계가 권문세족에게 빌붙다가 최영이 오만이란 군사의 통솔권을 주자 이때다 하고 배신하는 시나리오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이성계는 어쨌든 주인공이니까요.
한마디 더 보태자면 조선의 건국을 '천명'으로 묘사하는 드라마의 설정에 적잖이 실망한 것도 사실 입니다. 정도전은 윤소종(이병욱)과 신진사대부 세력을 움직여 이성계가 회군하더라도 우왕(박진우)이 처벌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작하라 지시합니다. 국가란 이렇게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고 역사는 초자연적인 힘 보다는 사람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이성계의 역사가 사서를 통해 미화된 역사라고는 하나 최영 때문에 눈물흘리면서도 운명적으로 존경하는 영웅을 죽일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건 뭔가 우습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물론 정도전이 주장하는 '천명'은 초자연적인 힘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군주가 덕이 없으면 천명이 옮겨간다는 맹자의 사상을 드라마 속 정도전은 나름대로 잘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폼나게 타고 있던 백마가 사실은 명마가 아니라 돌연변이거나 산전수전 다 겪은 늙고 노련한 말이라는 진실처럼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인간 이성계의 욕심과 야망을 좀 더 집중적으로 파헤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최영은 야망이 넘치는 이성계에게 군사 5만이란 위험한 칼자루를 쥐어주었고 그 칼자루가 배신의 계기가 되었다는 '인간 이성계' 시나리오도 괜찮지 않았나 싶습니다.
드라마 엔딩 부분에 최영 장군의 무덤이 등장하더군요. 최영 장군의 후손들이 떼를 옮겨 심어도 풀이 자라지 않던 적분이 1976년부터는 풀이 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무덤에서 풀이 나지 않은 이유가 무속인들의 무속 행사 때문이란 말도 있었고 무덤의 흙이 특별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었습니다만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동안은 풀이 자라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성계에게 배신당한 최영 장군의 원혼은 조선 왕조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일까요(그 시기쯤 때마침 영친왕이 사망하긴 했군요, 1970년). 어쨌든 위화도 회군을 막은 초자연적인 힘이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게 만든 원한이나 믿을 수 없다는 부분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정도전'을 통해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것은 한번 더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말을 돌려 개경을 향했고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어명을 어겼으니 반역이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드라마 속 이성계는 끝까지 최영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나 반역자가 된 5만 병사와 동료인 장군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최영을 죽여야하는 입장
입니다. 따로 야사가 전하지 않는 이상 후손들은 고려에 충성스러우면서도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율배반적인 이성계를 부정할 수 없는 셈입니다. 재미있게 봤고 또 흥미로웠지만 역시 가장 아쉬운 부분은 현대인이 바꿀 수 없는 역사 자체의 미화로군요. 주인공 정도전의 리더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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