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정말 쉽게 사람을 베고 죽이지만 사람을 피나도록 때리고 상처주는 일은 생각 만큼 쉽지 않습니다. 영화에선 마치 게임이라도 하듯 능숙하게 주먹을 주고 받지만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상대방을 폭행했다가 제풀에 지쳐 주저앉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하물며 칼로 찌르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사람들이 주먹이나 흉기를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독한 마음 먹고 민규(김민기)를 두들겨 팬 창만(이희준)은 주차장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 맙니다. 미선(서유정)의 돈을 뺐고도 모자라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폭행한 민규를 혼낼 이유야 많겠지만 모질게 민규를 때리는 순간 사람이 사람에게 할 짓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의리가 넘치는 창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구요.
민규를 폭행하고 비참한 마음에 오열하는 창만.
유명 소매치기 강복천(임현식)의 딸로 태어나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유나(김옥빈). 소매치기가 타고난 천직이라도 되는 양 쉽게 바닥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유나는 거리를 떠돌며 먹이를 찾는 도둑고양이에 비교되기도 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동물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전직 경찰 봉달호(안내상)은 눈치보는 도둑놈들의 눈과는 다르게 '단 한번도 어느 누구의 시선도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며 유나는 보통 도둑놈들과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창만은 유나가 바닥식구들을 속이고 이간질시킨 화숙(민혜린)에게 칼을 들이대는 거친 모습을 보고 어릴 때 잡아온 황조롱이를 떠올리기도 하죠.
창만은 유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면서도 유나가 왜 소매치기 생활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만은 고 2때 외삼촌 집에서 가출해 어렵게 살았지만 남들에게 속으면서도 '바른 생활'을 포기한적이 없습니다. 유나와 어떻게든 자신의 방식대로 함께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유나가 가업(?)을 물려받았는지는 몰랐습니다. 남들이 다 비난하는 범죄고 경찰에 언제 잡힐지 몰라 아슬아슬하고 때로는 납치당할뻔 하는 유나의 생활을 누군들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소매치기라는 범죄는 개성의 차원도 아니고 생각이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선의 돈을 뺐고도 폭행한 민규. 유나는 응징하려 한다.
잘 보면 유나의 주변 사람들은 묘하게 유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옥에 드나드는 아버지 때문에 보호받지 못한 유나는 현정(이빛나)처럼 깡순(라미란)의 무리에 끼어 두들겨 맞고 지갑을 훔치는 지독한 생활을 견뎠습니다. 어린 유나의 눈으로 본 바닥식구들은 범죄에 어린아이를 이용해먹고 감옥에 가도록 내버려두는 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정에 굶주린 현정이 험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유나도 깡순이나 양순(오나라)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유나는 현정을 보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립니다. 유나의 동료 윤지(하은설)에게 아이스크림도 주고 유나를 친언니처럼 잘 따르는 현정에게 윤지가 '순진하고 때가 안 묻었다'고 했더니 유나는 '띨띨한' 거라며 '나도 저 나이엔 아이스크림, 솜사탕 좋아하고 아무나 믿고 따르고, 다 내 맘같은 줄 알고 띨띨했다'고 말합니다. 의지할 곳 없는 유나도 그런 식으로 범죄세계에 발을 붙이고 전과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새 사람을 신뢰하고 착한 마음으로 대해주면 상대방도 나에게 잘해주리란 생각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거죠. 매맞는 현정을 자수시키고 챙겨주는 유나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한편 유나와 업종(?)이 다른,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보호자없이 자란 유나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좀 잘 풀리면 전직 형사 달호(안내상)에게 볶이면서 사는 전직 소매치기 양순이나, 호스티스 생활로 시작해 한사장(이문식)의 아내가 된 홍여사(김희정)처럼 콜라텍 주인이 되어 아등바등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CCTV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돈많은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미선처럼 꽃뱀이 되었을까요? 범죄 아닌 성실한 삶을 선택하면 돈은 없어도 칠복(김영웅)의 아내 혜숙(김은수)처럼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나의 거리'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도시라는 정글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유나에겐 어떻게 살아도 전과자 출신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체념이 엿보입니다. 현정이같은 아이로 시작해 바닥식구가 되고 혜숙처럼 힘들게 생활비를 버는 중년의 여성이 되었다가 운나쁘면 장노인(정종준)처럼 구청에서 내주는 돈을 받는 처지가 되는 사람들은 탈출구가 없다는 체념 말입니다. 황조롱이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야생의 황조롱이를 길들인 창만, 그런 창만에게 기대고 싶어하면서도 유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바닥'이 삶의 현장입니다. 그렇기에 식구들을 속인 화숙에게 분노하고 민규를 응징하겠다며 팔팔 뛰는 거겠죠.
믿고 의지할 곳 없는 16살 어린아이가 도둑이 되는 과정.
동시에 유나의 심리는 창만에게 길들여지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야생의 동물이나 길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상처받은 동물이 먹이를 곱게 받아먹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평소 사람들에게 학대받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먹이를 먹고 가까이 가면 할퀼 듯이 경계합니다. 지금 먹이를 주는 인간이 내일도 오늘처럼 친절하게 잠자리를 주고 먹이를 주리란 믿음을 가질 수 없기에 언제라도 정을 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야생동물의 마음. 창만을 바라보는 유나의 마음이 딱 그렇죠. 길들여짐과 야생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창만은 유나가 칼을 들고 화숙을 위협하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다. 유나가 속한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지만 유나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내키지 않기에 봉달호의 말대로 직접 민규를 처리하기로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유나를 막아보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창만은 유나의 적나라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상대못할 인간 말종이라도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내가 때린 민규 이 놈은 어떻게 미선을 때렸을까. '나한테 맞은 니가 너무 불쌍해서, 너 이렇게 때린 내가 너무 비참해서, 이 세상이 슬퍼서 운다'는 창만. 창만은 유나가 견뎌야했던 세계를 느끼고 오열합니다.
유나의 세계를 직접 겪게된 창만. 유나를 이해할까?
소매치기가 나쁘다는 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꽃뱀이 나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진짜 못된 사람은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서 나쁜 짓하는 방법도 압니다. '유나의 거리'는 그런 진짜 악인이 아닌, 타인들을 등쳐먹고 살지만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악인들을 정당화하기 보단 그냥 지켜봅니다. 짠 냄새나는 삶을 들여다 봅니다. 민규는 지금까지 등장한 어떤 캐릭터 보다 나쁜 놈이고 뻔뻔했죠. 유나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착한 창만의 오열은 그래서 더 입맛이 씁니다. 유나가 속한 '바닥식구'들의 생리가 얼마나 처절한지 때려보고 알았을테니까요. 꽃뱀과 제비와 소매치기, 그리고 바른생활 사나이의 갈등이 이번엔 어떻게 마무리될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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