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방송작가의 삶이 어떨까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방송작가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보조작가들이 모아온 자료로 시나리오를 쓰고 퀭해진 얼굴로 예민한 행동을 하곤 하지만 그것 역시 작가에 의해 창작된 판타지 중에 하나겠지요. 방송작가들은 평소에 어떤 삶을 살까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유나의 거리' 김운경 작가라면 아마도 평범한 아저씨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거리의 사람 하나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유심히 들여다볼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김운경 작가의 시나리오는 인기 드라마 대본처럼 충격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납니다.
'강데렐라'가 된 소매치기 유나.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김운경 작가의 '서울의 달(1994)' 주인공들은 지금 억대 출연료를 받는 대배우들입니다. 농고를 졸업해 서울로 상경했던 춘섭 역의 최민식은 헐리우드를 넘나드는 배우가 됐고 중학교를 중퇴하고 제비족 노릇을 하던 홍식 역의 한석규는 '비밀의 문'에 출연중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화투를 치며 '와탕카'를 외치던 변태 미술선생 김인철 역의 백윤식은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슈트레제만 역을 맡고 있습니다. 김운경 작가가 그 배우들과 함께한 건 20년전이고 이제는 과거의 배우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나의 거리' 마지막 시나리오에 최선을 다하고 있겠죠.
당시의 배우들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유나의 거리'를 통해 좋은 인상을 남긴 배우들은 또다른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김옥빈의 연기를 다시 봤다는 시청자도 있고 창만이 정말 매력있다며 이희준을 호평한 사람도 있고 신소율이 자기 역할을 얄밉게 잘한다는 평도 있습니다. TV에서 익숙한 조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인에 가까웠던 오나라, 강신효, 하은설같은 배우들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직업만 특별했지 내용은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담았던 드라마 '유나의 거리'. 삶이 드라마같고 드라마가 진짜 인생들의 이야기같은 이 드라마.
진짜 삶과 달리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든 시청자에게 끝을 보여줘야합니다. 김운경 작가는 이 드라마에 어떤 결말을 준비했을까요? 지독하게 현실적인 인생의 쓴맛? 아니면 있는 듯 없는 듯 빛나는 소중한 인생의 희망? 그것도 아니면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는, 사탕같은 달달한 끝모습을 보여줄까요? '유나의 거리' 어제 방송분이 벌써 44회입니다. 지금까지는 '서울의 달'처럼 씁쓸한 끝이 될 것같진 않습니다. 그러나 창만(이희준)은 어린 시절 눈물을 머금고 황조롱이를 날려보냈듯 유나도 멀리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죠. 둘의 사랑을 마무리할 시간인 것입니다.
어쩐지 이별할 것같은, 슬픈 예감이 드는 등장인물들.
모종의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유나와 창만 뿐만이 아닙니다. 치매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장노인(정종준)은 점점 더 한만복(이문식)의 속을 타게 합니다. 다가구 주택 사람들과 짱구엄마(이재신)가 하루씩 돌아가며 장노인을 돌보기로 했지만 언제까지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홍여사(김희정)와 함께 요양병원에 보내겠다 맘먹어보지만 그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의지할 곳 없는 팔순 노인네가 어딘가 모르게 짠합니다. 이러다 장노인과 한만복네 식구들이 영영 이별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유나(김옥빈)의 동거인이자 카페 주인인 미선(서유정)에게도 아직까지 남은 시련이 있는 듯합니다. 어릴 때 엄마가 자살하고 혼자 살아온 미선은 유부남들과 사귀며 돈을 뜯어냈지만 돈을 얻는 만큼 괴롭힘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소매치기들이 위장약을 늘 달고 살며 힘들어하는 것처럼 세상에 공짜는 없었던 거죠. 미선에게 약을 먹이고 못된 짓을 하려던 곽사장(최범호)과 미선이 신뢰하던 카페 직원 진미(주민경)이 함께인 걸로 봐선 미선이 생각치 못하게 뒷통수 맞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당당했던 창만이 초라한 모습으로 울먹이다
소매치기 전과 3범 유나를 어떻게든 돕고 싶었던 창만의 진심은 유나를 변화시켰습니다. 불꺼진 식당에서 마주친 창만과 유나. 유나는 소매치기 중 도망치다 창만의 식당에 숨었고 창만은 사장에게 월급을 받지 못한채 전기가 끊어진 식당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허름한 츄리닝 차림의 창만은 돈이 없어 유나에게 오만원을 받아야할 정도였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나가 소매치기임을 알게 된 창만의 노력으로 유나는 어릴 때 헤어진 엄마(송채환)를 만났고 의붓동생인 영미(정유민)와 의붓아버지(한갑수)도 얻었습니다.
창만은 봉달호(안내상)에게 유나를 변화시키는 일을 황조롱이를 길들이던 일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어릴 때 우연히 데리고 온 황조롱이가 창만에게 곁을 주지 않다가 나중에는 손에 올라오더란 이야길 즐겁게 말하던 창만은 유나가 소매치기를 그만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결국 이뤘습니다. 어릴 때 잃어버린 엄마를 만나면 그녀가 달라지리라 생각했어도 그 변화가 창만과 유나가 이별할 수도 있는 원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야생의 황조롱이가 야생에서 살아야하는 것처럼 부잣집 딸이 된 유나도 그들과 어울려 살아야한다고 생각한 창만은 쓸쓸히 거리를 걷다 울먹입니다.
허름한 차림에 돈이 없어도 당당했던 창만이 처음으로 초라하게 울먹이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바라지 않고 계산없이 한사람 만을 위하는 창만의 사랑법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동시에 넓은 아파트에 많은 돈을 가지게 된 유나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한 부분이죠. 이미 주변 사람들은 유나를 '강데렐라'라 부르며 부러워하고 다른 대접을 합니다. 혜숙(김은숙)과 계팔(조희봉)은 취직자리를 부탁하고 홍여사는 어떻게 유나의 의붓아버지가 다영(신소율)을 취직시켜주진 않을까싶어 예전과는 백팔십도 달라진 태도로 유나를 대합니다. 양순(오나라)의 말처럼 유나는 집만 떠나는게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선 알던 사람들 모두와 영원히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태식(유건)과 소매치기 건을 준비할 때도 유나는 마치 뒷정리를 하는 듯 옷을 정리했습니다. 아파트를 구하는 유나는 빨래집게를 창만에게 돌려줬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빨래집게를 시작으로 창만의 이별은 시작된 걸까요? 콜라텍 지배인을 할 때는 누구에게나 당당하던 창만이 축 쳐진 모습으로 길을 걷다 우는 모습. 그동안은 싸구려 양복을 입고 월세에 살아도 자신있어 보였던 창만이 처음으로 초라해보이더군요. '강데렐라' 유나는 자신있게 유나의 어머니 앞에서 큰소리치던 창만을 한순간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유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주변 사람들.
창만은 요리에서 보일러 수리까지 못하는게 없는 재주꾼입니다. 그의 적극적인 성격과 타고난 성실함은 한만복네 식구들을 사로잡습니다. 차차차 콜라텍 지배인이라는 명함 만으로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돈많은 정사장(윤다훈) 만큼은 몰라도 조폭 출신으로 콜라텍 사장이 된 한만복 만큼은 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재벌 딸이 된 유나 앞에선 창만의 능력은 돈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보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더 이상 유나가 창만을 필요로 하는 것같지 않습니다. 서민들이 돈 앞에서 느끼는 위화감이 바로 이런 것이겠죠.
창만과 유나의 사랑이 또다른 이별이 될지 아니면 행복한 마무리가 될지는 유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집을 얻으러 나선 유나의 행동입니다. 창만은 유나가 멀어진 것 같다고 느끼고 있지만 아파트를 얻어 나간다면서 미선을 데리고 나가려는 유나는 아무래도 공부를 시작한 것같습니다. 유나는 다영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던 창만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죠. 카페에서 책을 읽고 영미와 전시회를 다니는 유나가 창만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별을 준비하는 창만. 유나는 무얼하고 있는걸까?
돈 앞에서 사람은 나약해집니다. 성실하고 정직하던 진미가 곽사장과 함께 하는 것처럼 찬미(김윤주)의 남자친구(박우천)가 협박범이 된 것처럼 돈의 유혹 앞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죠. 그러나 사람들에게 정이 많고 바닥식구들을 가족처럼 챙겨줬던 유나라면 창만의 좋은 점을 그 누구 보다 인정하는 유나라면 돈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사람사는 세상을 잘 아는 김운경 작가가 소중하게 만든 캐릭터를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것같다는 일종의 믿음입니다. 노숙자 차림을 하고서도 사람좋게 웃을 줄 알던 창만이 유나의 클락션 소리에 울먹이며 뒤돌아서는 모습이 왠지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한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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