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권 음악감독은 2011년 발표된 김연아의 '오마쥬 투 코리아' 즉 '아리랑'으로도 유명하지만 드라마 '짝패(2011)'를 비롯한 여러 드라마 OST를 작곡한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역시나 작곡을 담당한 음악감독이 남달라서 그런지 '함정'이나 '유나의 왈츠', '사랑따위로', '긴 밤이 지나면'같은 '유나의 거리' OST가 드라마와 함께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죠. 특히 '유나의 왈츠'같은 노래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드라마를 잘 살린 노래 가사에 드라마 시청이 끝나도 여운이 남곤 합니다. 혼자 외로워하는 유나의 모습이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껄끄러움이 저절로 연상되는 노래에 저절로 차분한 기분이 됩니다. 그만큼 공감이 간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다영에게 창만을 양보하란 말을 듣게 된 유나.
소매치기 전과 3범 강유나(김옥빈). 전설의 소매치기였던 아버지 강복천(임현식)의 딸로 태어나 혼자 살아왔고 깡순(라미란)이나 양순(오나라)같은 소매치기들 틈에서 살아남아야했던 유나는 창만(이희준)과의 만남으로 자신이 얼마나 거칠게 살아왔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뺐고 빼앗기는 세상에서 소매치기는 깡패나 강도와는 달리 그래도 양심은 지키는 도둑이라 자부했지만 소매치기 역시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범죄였고 떳떳하지는 않아도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전과가 엄마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편의점 테이블에 불러앉힌 다영(신소율)과의 대화로 유나는 한번 더 깨닫게 되겠죠. 유나는 창만을 내심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번도 창만을 적극적으로 붙잡으려 한 적이 없고 남들 앞에서 좋아한다는 표현을 한 적도 없습니다. 엔딩곡으로 흐르는 노래 가사처럼 어릴 때부터 쌓여온 유나의 외로움은 사랑 따위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늘 유나의 주변을 머물다 떠나간 사람들처럼 창만 역시 그냥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창만을 좋아한다고 하기엔 다영처럼 영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겠죠.
한만복(이문식)과 홍여사(김희정)는 창만과 다영을 맺어주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망설이면서 창만을 내버려둔다면 창만은 유나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장노인(정종준)의 문간방 앞에서 창만은 유나를 '가끔 질릴 때도 있는 축복'이라 표현하며 키스했습니다. 그러나 유나가 태식(유건)과 소매치기를 계획하고 미선(서유정)을 괴롭히는 곽사장(최범호)을 폭행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선택을 한다면 창만도 유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다영과의 대화로 유나는 그런 위기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지도 모르죠. 창만이 소중한 만큼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소 철없어 보이는 다영의 도발은 어떻게 보면 유나와 창만의 사랑에 닥친 또 한번의 위기인 셈이고 다른 한편으론 창만의 외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는 징조인지도 모릅니다. 소매치기 유나를 뒤쫓으며 구박받고 싸우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야했던 창만이 드디어 유나를 길들이는데 성공했다는 걸 다음 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됩니다. 이미 유나는 엄마(송채환)와 의붓동생 영미(정유미)를 만나면서 소매치기를 그만두기로 한 상태입니다. 이제는 창만을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죠.
생각해보면 유행가 가사같은, '사랑한다'는 말은 참 쉽습니다. 그런데 뼈속깊이 사무친 외로움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은 때로 심장은 커녕 잠시 떠돌다 사라지는 입김처럼 가볍기만 합니다. 한사람을 온전히 품어주지 못하는 고백은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에게 잠시 불어온 봄바람에 불과하죠. 아버지 강복천은 손가락을 자르며 소매치기를 하지 말라 유언했지만 따지고 보면 유나가 한탕주의에 빠진 것도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소매치기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때 사랑했던 태식은 반복되는 감옥살이에 곁을 지켜주지 못했고 같은 바닥식구끼리도 자기 처지가 곤란하면 서로를 속고 속이곤 합니다.
창만은 가볍게 사랑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기 힘든 처지에서 혼자 자라온 유나 곁을 맴도는 창만은 무슨 일이든 말하고 부탁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고 해결사가 되었습니다. 소매치기를 그만 두게 하기 위해 유나의 엄마를 찾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유나의 거리'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사연을 지닌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부대끼며 서로의 속사정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따뜻하지만 그중에서도 창만의 사랑법은 요즘은 보기 힘든, 속이 꽉찬 사랑입니다. 추운 날 친구들끼리 나누는 따뜻한 소주 한잔처럼 이 사랑법에 적잖은 감동이 밀려오곤 하죠.
요즘은 보기 힘든 창만의 꽉찬 사랑법.
처음 '유나의 거리'가 50회라는 말을 들었을 땐 월화드라마 치고 길다고 생각했지만 등장인물 모두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펼쳐지고 보니 한회한회가 아쉬울 정도로 캐릭터가 흥미롭습니다. 소매치기, 조폭, 장물아비, 꽃뱀은 현실에서 쉽게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특이한 직업을 빼놓고 보면 모두가 현실의 우리들이 고민하는 주제들입니다. 이번주에는 홀로 늙어가는 장노인의 치매를 보며 이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외로움'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외로움을 이기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아주 조그만 관심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 행운이라고 하던가요. 창만은 이미 유나를 축복이라 말했고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세상에 기댈 곳 없이 혼자였던 유나는 창만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짜증부리고 굴복하는 창만도 완벽한 남자는 아니죠. 창만 역시 외롭고 쓸쓸하게 자랐고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살아온 외로운 사람입니다. 소매치기를 그만둔 유나가 창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그날이 바로 창만도 위로받는 날이 아닐까요. 그리고 재벌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두 사람의 사랑이야말로 현실 속의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축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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