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눈이 온 것처럼 서리가 하얗게 앉았더군요. 아무래도 이 지역은 도시 보다 겨울이 빨리 오고 밤낮의 기온차가 큽니다. 나무들도 겨울 준비를 하느냐 낙엽을 떨구고 여러해살이 뿌리 식물들은 줄기를 빠짝 말려 겨울날 준비를 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구는 식물도 마찬가지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겨울을 버티려면 영양분을 빼앗아 먹는 잎도 열매도 모두 떨궈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으면 욕구는 젊은 시절 그대로인데 지친 몸과 정신이 버티지 못해 많은 걸 포기해야합니다. 머리가 하얗게 샌 몸으로 욕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늙은 몸이 버티지 못하게 되거든요. 나이먹었다고 해서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새벽 한시에 창만과 함께 콜라텍을 찾은 장노인. 그는 짱구엄마와 춤을 추며 잊지 못할 행복한 기억을 만든다.
'유나의 거리'에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빠듯한 경제사정에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소매치기가 되었다는 남수(강신효)같은 남자도 있고 배운 거 없이 주먹 하나로 조폭 생활을 하다 콜라텍 사장이 된 한만복(이문식)같은 남자도 있습니다. 호스티스 출신으로 이제는 깍쟁이 사모님이 된 홍여사(김희정)같은 여자도 있고 마약 중독된 남편에게 폭행당하다 가게 직원과 눈맞아 도망친 혜숙(김은수)같은 여자도 있죠. 그런가 하면 창만(이희준)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대생 다영(신소율)같은 젊은 여자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복잡한 사연 만큼이나 다양한 욕망이 존재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공통적인 욕망 이외에도 자식, 부유함, 사랑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자 이유가 됩니다. 그들끼리 사소한 일로 갈등하고 배척하는 중요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욕망 때문이죠. 그러나 한만복네 집 문간방에 사는 장노인(정종준)의 욕망은 젊은 사람들의 바람에 비하면 소박하고 초라했습니다. 정부지원금과 김치를 받아먹고 사는 장노인이 원해도 이뤄질 수 있는 욕망은 별로 없기 때문이죠.
어찌된 사연인지 모르지만 장노인은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고 했습니다. 과거엔 쌍도끼라는 이름의 건달로 이름을 날렸고 한만복이나 밴댕이(윤용현)이 형님이라며 대접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버리는 치매노인일 뿐입니다. 무릎이 시원찮아도 걸어다닐 수 있고 밥챙겨먹을 수 있을 때는 간간이 직접 나서 이웃들을 도와줬고 대화도 나눴지만 이제는 종종 창만의 얼굴도 못 알아보기 때문에 그 마저 불가능합니다. 가끔 찾아오는 '치마두른 여편네' 자원봉사자 아줌마와 지루박 봉사하러 오는 짱구엄마(이재신)를 만나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이젠 안되는 일이죠.
움직이기도 불편한 나이든 노인이 혼자 살며 느끼는 외로움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괴로움일 것입니다. 노총각 계팔(조희봉)이 짝이 필요하다며 호소하는 외로움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고독하겠죠. 많은 사람들이 장노인을 챙겨주고 한만복도 겉으로는 티격태격하지만 물심양면으로 장노인을 잘 돌봐주었습니다. 그들의 온정은 따뜻하지만 장노인의 고독에 비하면 순간의 온기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나름 즐겁게 살던 장노인의 치매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병원에서 마주친 건달 후배 독사(홍석연)의 죽음이었겠죠.
이제는 치매가 심해져 한만복의 집을 떠나야하는 장노인.
나이를 먹는다는 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때가 되서 죽는 건 자연의 섭리지만 그 공포를 이겨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장노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독사가 암에 걸려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죽는 걸 보면서 세상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겠죠. 노인들에게는 배우자의 죽음과 아는 사람의 죽음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장노인을 걱정해 교대로 잠을 자주는 이웃들을 괴롭게 하고 밖으로 나가겠다며 문열어달라 소리치는 장노인의 모습에서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이대로라면 만복의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전에도 장노인은 짱구엄마와 지르박을 추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했습니다. 짱구엄마의 표현대로 '치마두른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춤은 외롭고 한가한 장노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즐거움이자 오락이었기 때문입니다. 콜라텍을 가득 메운 다른 노인들처럼 춤추고 싶다는 장노인의 소박한 욕망은 그의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보기 전까지는 콜라텍이 어떤 장소인지 잘 몰랐습니다.
장노인이 입원까지 하면서 춤을 좋아한 이유.
화려한 댄스 스포츠는 알지만 연령대가 높은 어르신들이 콜라텍에서 소일하며 무료한 하루를 활기차게 즐기고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불륜의 무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죠.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들어 피치 못하게 혼자가 되면 어디에서 즐거움을 얻는지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나이많은 사람들이 욕망이나 욕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죠. 몸은 늙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걸 잘 모릅니다.
치매 때문에 하루종일 집안에 있는 장노인을 위해 미선(서유정)이 카페에 모시고 가서 맥주 한잔을 대접했을 때 장노인은 카페를 떠나며 오랫동안 뒤돌아 보았습니다. 다시는 볼 것같지 않은 장소를, 유쾌한 기억을 만든 그곳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치매 때문에 대답도 잘 하지 못하는 그가 창만에게 콜라텍에 가고 싶다며 생떼를 쓰다시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즐거운 추억을 만든 장소이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곳이었기 때문이죠. 창만이 그냥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장노인의 고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뜻하게 웃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행복한 기억 만을 남기고 싶은 장노인의 마지막 소원.
지팡이를 짚고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짱구엄마에게 '여사님 한번 추실까요'라며 손을 내미는 장노인.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 나이가 어때서'입니다. 사랑에 대한 욕망과 행복에 대한 욕망에 나이가 무슨 필요있나요.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욕망도 아닙니다. 치매 노인의 마지막 바람은 더 이상 기억을 잃어버리기전에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것입니다. 콜라텍에서 한껏 멋을 내며 춤을 추는 장노인의 초라한 욕망이 어쩐지 짠합니다. 사람사는게 항상 다영이와 유나(김옥빈), 창만의 삼각관계처럼 치열한 것도 아니고 재벌들의 돈자랑처럼 화려한 것도 아니니까요.
양로원으로 가기전 마지막으로 춤추고 싶다는 장노인의 콜라텍 방문은 앞으로 장노인이 살아 있는 동안 되새김질할 추억거리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장노인의 안타까운 모습은 나이먹어서 후회하기전에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소중한 존재가 옆에 있을 때 아껴주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인정에 밝은 유나라면 장노인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겠죠. 유나가 보고 싶다며 창만을 불러내는 예고편을 보니 내일쯤은 다영과의 삼각관계가 정리될 것도 같습니다. 장노인은 이대로 세상을 떠나게 될까요 아니면 양로원으로 가 옛날을 추억하며 살게 될까요. 춤을 추는 장노인의 모습이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모르게 마음이 찡해서 이번에도 한참 동안 여운이 남습니다.
'한국 드라마 이야기 > 유나의 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나의 거리, 사람을 바꿀 힘을 가진 작은 영웅 김창만 (1) | 2014.11.05 |
---|---|
유나의 거리, 강데렐라 유나의 마지막 선택은 사람이었다 (1) | 2014.10.29 |
유나의 거리,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가 된 김창만 (0) | 2014.10.22 |
유나의 거리, 외로운 소매치기를 위한 창만의 사랑법 (0) | 2014.10.15 |
유나의 거리, 바른 생활 사나이 창만 유나의 세계를 보다 (2) | 2014.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