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유나의 거리

유나의 거리, 사람을 바꿀 힘을 가진 작은 영웅 김창만

Shain 2014. 11. 5. 08:21
728x90
반응형

이른바 '영웅'은 능력이 뛰어난 수퍼맨을 뜻하기도 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리를 통솔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보통 선거할 때 '뽑을 인물이 없다'고 하는 말은 그런 영웅이나 지도자 자질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뜻일 때가 많죠. 제가 생각하는 영웅의 개념은 좀 다릅니다. 진짜 영웅은 스스로가 잘난 것 보다 많은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력이나 경제력로 어떻게 하길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뿜어나오는 '포스'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영웅입니다. 시대가 바뀐 만큼 '나를 따르라'며 나서는 위대한 영웅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작은 영웅이 더욱 필요한 요즘입니다.


한만복네 식구들에게 창만이 일으킨 기적. 창만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영웅이다.


그러고 보니 '유나의 거리'에서 찌질한 연하남편 변칠복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 김영웅이군요. 변칠복이란 캐릭터는 언뜻 보면 '영웅'이란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 캐릭터가 가진 감동에 재미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창만(이희준)에게 편의점 맥주를 사줄 정도로 쪼잔하고 혜숙(김은수)의 벌금낼 돈도 없을 만큼 사정이 안 좋지만 마약중독자인 사장에게 혜숙을 구해 도망칠 만큼 용감한 구석이 있습니다. 혜숙 역시 자식을 빌미로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편을 독하게 떼어내고 밴댕이(윤용현)에게 남편의 체면을 세워줄 만큼 영리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영웅'의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나(김옥빈)의 계부이자 기업 총수인 영미아빠(한갑수)도 자신의 위기를 용감하게 헤쳐나갑니다. 유나의 엄마(송채환)이 전직 소매치기라는, 말도 안되는 루머에 시달리던 영미아빠는 '기자를 왜 피하냐. 나라면 정면승부하겠다'는 창만의 말을 듣고 기자들을 불러 직접 재혼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그들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괴롭히는 기자들은 쓰레기처럼 행동했지만 사생활이 모두 공개되면 불리한 건 영미네 가족이었습니다.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진실 보다는 루머를 믿는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하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털어놓은 김회장은 '나와 내 아내는 소매치기의 대부와 대모가 될 것'이라는 억지기사에도 당당하게 웃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만복(이문식)네 다세대주택 사람들은 처음 등장할 땐 약간은 야박하고 약간은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폭 출신 한만복은 젊은 시절처럼 주먹이나 협박으로 사람을 조종하려 듭니다. 다영(신소율)이 역을 맡지 못하자 교수를 때려서라도 딸이 원하는 걸 해주려 할 정도였으니까요. 호스티스 출신 홍여사(김희정)는 자살한 윗층 아가씨의 오빠에게 집세를 챙기며 흉을 봅니다. 정사장(윤다훈)에게 꽃뱀 노릇을 하는 미선(서유정)이나 소매치기들도 다를 바 없었죠. 그런데 그들의 면면을 잘 살펴보면 빡빡한 세상살이에 익숙해진 모습 뒤로 따뜻한 속마음이 있었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죠.


김창만은 아는 것도 많고 보일러수리부터 요리까지 못하는게 없지만 다세대주택 사람들 만큼이나 가진게 없고 소위 말하는 '빽'도 없는 처지입니다. 하다 못해 동네 깡패처럼 폼잡고 으스대는 성격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이층에 세들어온 창만은 차차차 콜라텍 지배인이 되어 한만복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따뜻하게 이끌기 시작합니다. 창만이 그들을 챙겨주는 만큼 한만복네 사람들도 바뀝니다. 다소 이기적이던 한사장이 창만을 아들처럼 여기며 신뢰하고 장노인(정종준)을 비롯한 다세대 사람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분명 달라진 것입니다. 조폭이란 과거 때문에 동민(백창민)과 갈등이 생겼을 때도 창만이 중재해주었습니다.


기자들 때문에 애먹던 영미아빠는 창만의 말대로 당당히 맞선다.


외로운 장노인을 아버지처럼 챙기며 아침저녁으로 찾아본 사람도 창만이고 칠복이네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적극 나서는 창만은 한만복의 애물단지, 찌질이 계팔(조희봉)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계팔이란 이름 대신 '개삼촌'이라 불리고 사람들과는 어쩐지 의사소통이 잘 안돼 개하고만 친하다는 계팔은 외모나 인상도 더럽지만 눈치없고 속없는 말 때문에 미움받곤 했습니다. 한만복은 계팔이 가짜 비아그라를 팔다 잡혀가자 이 기회에 처남인 계팔을 쫓아내고 옥탑방도 부숴 버리겠다고 합니다. 창만이 계팔의 벌금을 대신 내주고 일용직으로 고용해준 덕에 계팔도 한만복네 식구들과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게 됩니다.


무엇 보다 창만이 소매치기 유나를 감싸주고 엄마를 만나도록 설득해 변화시키는 모습은 그 어떤 이야기 보다 아름답고 드라마틱합니다. 바닥식구들을 가족처럼 챙기고 정을 나누면서도 유나에게 세상은 모질고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무작정 뒤쫓아다니고 소매치기를 못하게 막는 창만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벽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아무리 착한 마음을 숨긴 유나라도 변화하기 힘들었겠죠. 변화란 건 강제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끌어야하는 것이란 깨달음도 줍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있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대의 진짜 영웅은 누군가를 끌고가는 인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장점을 끌어낼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창만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감싸주는 것도 아닙니다. 유나의 소매치기 일을 비난할 때는 누구 보다 강하게 비난합니다. 오랜 시간 유나와 대화하며 속사정을 듣고 유나에 대한 일을 봉달호(안내상)과 상의하며 고민하는 모습은 유나가 좋은 아파트와 자동차 보다 창만을 선택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유나에게 깊숙히 숨겨진 장점과 선함을 서서히 끌어낼 수 있게 해줍니다. 기업총수인  영미아빠가 회사로 창만을 불러들인 이유도 그의 사람됨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창만이라면 무조건 기회가 왔다고 해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잘 따져볼 것이 봅니다.


흔히들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나의 거리'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각박해졌다기 보다 따뜻함을 나눌 기회가 줄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창만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소매치기부터 기업총수 모두에게 신뢰를 주었습니다. 비록 창만의 연인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라도 창만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각박한 세상을 헤쳐갈 등대와 등을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생긴 셈이죠. 우리 사회에 진짜 필요한 영웅, 우리 사회를 바꿔놓을 영웅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어쩌면 김창만이라는 캐릭터야 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김운경 작가가 오랫동안 바랐던 이 시대의 영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