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감정과잉 연기에 지칠 때가 많습니다. 워낙 드라마 속 상황 자체가 극단적이라 극중 주인공이 악을 쓰고 대성통곡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기분에 따라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원래 연기라는 게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감정이나 대사를 정확히 전달하려면 다소 과장된 표정이나 몸짓, 큰 소리를 동반해야하지만 그래도 매일 울고 매일 소리를 질러대는 건 보기 부담스럽죠. 감정과잉의 연기가 많다는 건 그만큼 드라마가 자극적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거기다 TV 속에서 서민이 실종된 후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재벌가의 재산 다툼이나 복수같은 드라마 줄거리는 시청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가끔 서민이라며 등장하는 주인공도 기껏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수준이죠.
'유나의 거리'를 통해 저력을 인정받은 이희준, 김옥빈. 그러나 조연들 역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었다.
그 많은 월화 드라마를 두고 김운경 작가의 '유나의 거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김운경 작가라면 현대인들이 목말라하는 '사람'의 섬세한 감정을 보여줍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부잣집 사람들이 악다구니하고 독설하지 않아도 조근조근 대화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감정과잉 드라마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50회를 마지막으로 '유나의 거리'는 '서울의 달'처럼 사람들의 추억이 되어버렸죠. 창만(이희준)은 유나(김옥빈)에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오리배를 타고 싶다'고 말했고 유나도 그에 응답했죠.
전에도 한번 적은 적이 있지만 김운경 작가의 히트작 '서울의 달(1994)' 주인공들은 이제 아무 드라마에나 출연하지 않는 유명배우들입니다. 채시라야 '여명의 눈동자(1991)'로 이미 주연급 배우였지만 최민식, 한석규 등은 '서울의 달'을 기점으로 최고의 배우가 되었고 백윤식은 개성강한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서울의 달'에서 제비족 노릇을 하던 배우 한석규는 '유나의 거리' 이희준과 비슷했습니다. 저 배우 크게 되겠구나 싶은 느낌이 있었죠, TV에서 다소 부진했던 김옥빈도 유나 역으로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어필했습니다. 벌써 다영이 역을 하던 신소율은 조연급에서 벗어나 KBS '달콤한 비밀'의 주연 연기자로 발탁되었더군요.
때로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감정과잉 연기로 저력을 인정받는 배우들도 있지만 친근한 대사와 잔잔한 감정 표현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배우들도 있습니다. 신소율이 얼마나 얄밉게 대학생 역할을 해냈는지 김옥빈이 속은 여리면서도 겉으론 툴툴거리는 소매치기 역에 얼마나 어울렸는지 또 이희준이 박력있으면서도 착한 청년 창만과 얼마나 잘 맞았나를 생각해보면 그 배우들의 다음 드라마가 기대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연 배우들의 성장과는 별개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정감이 갔던 배우들은 바로 조연급 연기자들입니다.
주연은 이희준이나 김옥빈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등장인물 모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듯 그들은 드라마에서는 조연이지만 캐릭터의 인생에서는 주인공들이죠. 봉달호 역의 안내상, 한만복 역의 이문식, 홍여사 역의 김희정이나 계팔 조희봉, 미선 역의 서유정은 이미 공중파 등에서 얼굴을 알린 베테랑 연기자들입니다(개인적으로 윤지 하은설이 그렇게 오래전에 데뷰한 배우인줄은 몰랐습니다). 한동안 공중파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노인 정종준이나 고물상 장물아비 역의 기정수, 양순 오나라, 칠복 김영웅, 혜숙 김은수, 밴댕이 윤용현, 영미 아빠 역을 한 한갑수, 찬미 주민경 등 이 드라마를 통해 캐릭터를 어필한 배우들 모두가 그들 만의 사연이 있었죠.
주인공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한 그들의 복잡한 사연.
조폭과 호스티스 출신으로 인생 역전한 한만복네 부부도 마약에 취해 미친 남편을 피해 연하의 직원과 도망쳐서 사는 칠복과 혜숙의 이야기도 옥탑방에서 개를 키우고 사는 인상 더러운 독신남 계팔도, 소매치기와 전직 경찰의 애틋한 사랑도 부모를 잃고 꽃뱀이 된 미선의 눈물나는 과거사도 가족과 부하들이 찾지 않는 전직 조폭 장노인도 각기 다른 한편의 드라마고 소설같습니다. 나이든 어른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이야길 많이 하시죠. 세상 어느 누구의 이야기든 관심가지고 살펴 보면 드라마틱하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구멍난 속옷을 입고 혼자 누룽지를 끓여먹는 독거노인은 어떤 사연으로 혼자 살게 됐을까? 소매치기로 생계를 해결하던 젊은 여자가 원수처럼 여기던, 능글능글한 경찰과 눈이 맞게 된 이유는 뭘까요? 돈많은 남자를 등쳐먹던 꽃뱀이 돈도 없고 센스도 없는 옥탑방 남자와 사랑에 빠진 속마음은 뭘까요? 돈없어서 남의 지갑을 털던 젊은 여성이 1키로에 만원도 안하는 폐지줍는 남자와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은 뭘까요? 춤좋아하는 짱구엄마(이제신)이 고시원에 혼자 사는 이유는 뭘까요?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들의 드라마는 주인공 못지 않게 감동적입니다.
창만이 유나를 바꾼 방식 그대로 사회적 기업을 만든 영미아빠.
이렇게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고야 마는 김운경 작가의 시나리오는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대한민국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 영웅이나 재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90퍼센트 이상을 채우고 있는 우리들이야 말로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대한민국의 주인공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보잘 것 없어서, 전과자라서, 가난해서, 늙어서, 못나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하찮기만 한 걸까요? 결국 마지막회에서 그들은 속된 말로 오지랍넓은, 좋은 말로 인심좋은 청년 창만과 소매치기로 살아야했던 유나의 도움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듭니다. '도란도란 도시락'이라는 사회적 기업 말이죠.
누군가의 평가처럼 전과 3범 의붓딸을 친딸로 받아들이고 아내의 과거로 인한 스캔들을 감내하는 기업회장 김종오(한갑수)와 그가 만든 전과자 출신들의 사회적 기업은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성공적인 사회적 기업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만이가 따뜻한 애정으로 외로운 유나의 마음을 돌려놓듯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많은 걸 달라지게 만들죠. 아내의 딸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의붓아버지 김종오는 처음에는 유나만 '그들' 속에서 꺼내오려 했지만 결국엔 창만이 유나를 바꿔놓은 그 애정을 배운 것입니다. 봉달호(안내상)의 말처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사랑 따위'가 가끔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사람을 바꾸듯 세상도 애정과 관심을 쏟으면 바뀔 수 있다는 믿음.
흔한 드라마에서 연기 잘하는 조연급 연기자들은 주인공들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한 배경 역할을 합니다. 때로는 그들의 속사정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왜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시청자는 그 조연 연기자를 '그냥 나쁜 캐릭터'로 받아들일 뿐이죠. 허나 진짜 주인공은 거리에서 걷어차는 깡통처럼 힘겹게 세상살이를 버티는 사람들이란 것을 세상은 그 조연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드라마 속 캐릭터처럼 드라마가 끝나도 세상 어디에나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캐릭터 하나하나에 관심을 보여준, '유나의 거리'라는 또다른 추억을 만들어준 김운경 작와 배우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2014년 최고의 서민드라마로 추천합니다.
'한국 드라마 이야기 > 유나의 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나의 거리, 마지막회가 끝나도 궁금할 그 사람들 이야기 (2) | 2014.11.11 |
---|---|
유나의 거리, 사람을 바꿀 힘을 가진 작은 영웅 김창만 (1) | 2014.11.05 |
유나의 거리, 강데렐라 유나의 마지막 선택은 사람이었다 (1) | 2014.10.29 |
유나의 거리, 치매걸린 장노인의 소박한 행복 콜라텍 (0) | 2014.10.28 |
유나의 거리,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가 된 김창만 (0) | 201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