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오과장이 미생인 이유

Shain 2014. 10. 2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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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모 벤처기업 사장 면접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그 벤처기업은 위기가 닥치자 특이하게도 사장을 공모하기로 했고 응모했던 30여명의 지원자들 중 혹독한 면접 과정을 거쳐 단 한명이사장이 되었습니다. 최종 면접 때는 1박 2일 가까이 식사도 걸러가며 회사 사활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정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면접을 다녀왔다는 한 분의 이야기로는 최종 면접까지 올라가기전 지원한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행된 면접도 정말 살벌했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이 싫으면 당장 나가라고 했다나요. 요즘은 흔해진, 그러나 90년대까지만 해도 보기 드물었던 이른바 '압박 면접'이 이런 분위기입니다. 지원자들 대부분 IT업 쪽에서 꽤 알려진 사람들이다 보니 이런 면접 방식이 꽤 오래 입소문을 탔던 것같습니다.

 

'여긴 버티는게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며 '우리 모두는 미생'이라하는 오과장. 그는 왜 아직 완생이 아닐까.

 

취업준비생이라면 누구나 압박 면접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압박면접인지 사생활 노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인신공격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면접도 있다는 고발성 뉴스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면접관은 지원자의 약점과 단점에 대해 집요하게 공격해 지원자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혹은 고위 간부가 나타나 위압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지원자가 긴장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대처하는지 그 능력을 보고자 하는 취지의 압박면접은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드라마 '미생'의 인턴들은 회사 간부들 앞에서 PT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단점을 지적받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장 면접은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다 완벽한 사장을 뽑기 위한 자리였지만 대개의 신입사원 면접은 지원자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전제로 실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관들은 지원자들의 미흡함을 계속해서 지적합니다. 우열을 가르기 위한 지적일까요 아니면 길들이기 위한 지적일까요. 대부분의 사회초년생은 힘겨운 입사시험의 의미와 본뜻을 잘 알지도 못한채 몇가지 팁만 가지고 시험을 치릅니다.

 

PT의 정석을 보여준 장백기(강하늘), 안영이(강소라)같은 지원자를 보면 왠지 주눅이 들고 쌈빡한 아이디어를 가져온 지원자를 보면 '아 나는 왜 저 생각을 못했을까' 안타까워하고 장그래(임시완)처럼 발표에 서툴거나 개벽이 한석율(변요한)같이 웃기는 지원자를 보면 긴장을 잠시 풀며 웃어보기도 합니다. 내가 적어도 저 사람 보다는 낫지 않을까 위로도 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윽박지르는 면접관에 눌려 버벅거리는 지원자는 남의 일이 아닌 것같아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지요. 경쟁자이기 때문에 경계하면서도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낍니다.

 

오과장(이성민)의 말대로 인턴들은 모두 미생입니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으로 암기력 탁월하고 승부사 기질이 있는 장그래는 업무 능력과 발표는 형편없고 장백기는 요령껏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팀의 일원이 되기엔 남을 인정하는 능력이 모자랍니다.  현장을 최고로 여기며 섬유 재질을 파악하기 위해 여자 엉덩이까지 만진다는 한석율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고 최고의 능력을 갖춘 안영이는 비밀스런 가정사와 '여자'라는 점이 약점이 될 것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오과장은 그런 속사정을 재빨리 읽어내죠. 그런데 당연히 부족한 신입사원도 아닌 오과장과 상사들도 '미생'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신입사원들이 미생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과장은 왜?

 

오과장이 장그래에게 '너 돌아온 것 반갑지 않다'고 말한 건 영업 3팀이 워낙 바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한 까닭도 있지만 장그래의 어떤 점이 자신과 몹시 닮아서 인 까닭도 있는 듯합니다. 잠재적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되든 안 되든 진심으로 회사일에 임하는 장그래는 어쩌면 직장생활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겪어온 경험 때문에 장그래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겠죠. 요령좋은 다른 신입사원들과 장그래는 타입이 다릅니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라는 말로 장그래를 격려하는 오과장은 실무능력은 뛰어나지만 부족함을 느낍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드물게 오과장같은 상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지만 후배들에게 꼭 필요한 요점을 짚어주는 사수이자 부하직원의 잘못을 자기 일처럼 감싸고 일을 열심히 하다 못해 다른 부서 일까지 도맡아 합니다. 눈은 늘 충혈되어 있고 가끔 먹고 자는 것도 회사에서 해결하다 보니 웬만한 생활도구가 차와 사무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과장같은 타입은 일은 잘 하는데 승진에서 밀려나기 일수고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근무 여건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요령은 좋지 못한거죠. 일배우는데는 딱이지만 승진 욕심이 있는 부하직원에겐 좋은 선배가 아닙니다.

 

최전무(이경영)는 오과장과 대립되는 인물로 과거의 악연이 얽혀 있는 듯합니다. 부하직원을 품어주는 오과장과 냉정하고 불도저같은 최전무는 타입이 아예 다른 인물이죠. 장그래를 보며 '딱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오과장에게 선차장(신은정)은 '본인이 다친다'며 한마디합니다.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발목을 잡고 있을 때가 더 많다'는 선차장의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과장이 아직 미생인 이유죠. 물론 늘 변화하고 유동적인 직장생활에 '완생'이란게 있기는 있는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오과장이 보는 직장엔 최전무가 빠져 있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미생'들이 존재하는 직장.

 

최전무는 딱 봐도 성공 지향형 인물입니다. 회사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할 타입입니다. 이런 타입 상사는 부하직원으로선 죽을 맛이지만 직장에는 꼭 필요한 타입입니다. 오과장이 김동식 대리(김대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과거와 상관없이 최전무를 찾아갔어야 했고 최전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오과장의 부탁을 거절할 유형은 아니지만 오과장은 최전무에게 숙이는 일을 근본적으로 싫어합니다. 실무 능력은 있어도 그런 일이 잘 안되는 타입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직장을 보는 관점이 아예 다른 거죠. 

 

반면 장그래는 여자 엉덩이나 만지는 개벽이 한석율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PT 자리에서 한석율을 공격적으로 설득합니다. 땀냄새나고 닳고 닳은 상사의 실내화를 보여주며 '사무실이라는 현장의 전투화'라고 말합니다. 오과장이 최전무를 찾아가야한다고 마음먹게 만든 당사자가 장그래이듯 장그래는 이번에도 오과장과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자신과 맞지 않더라도 인정하고 한팀으로 만드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입니다. 동시에 '여자 엉덩이를 만진다'며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모두가 미생이란 점에선 장그래와 같다. 통찰력과 승부사 기질을 가진 장그래 이겨낼 수 있을까.

 

개인적 관점에서는 오과장이 누구나 선호할 만한 상사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최전무도 꼭 필요한 유형임을 인정하는 것. 사람좋은 오성식 과장은 그 부분이 아직까지 힘든 만큼 직장생활이 사내 '정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겠죠. 사실 '미생'을 보는 가장 중요한 재미 중 하나는 이렇듯 꼼꼼하게 짚어낸 여러 직장인들의 모습입니다. 마치 현실에서 캐릭터를 만들어낸 듯. 언젠가 직장에서 한번은 마주친 듯한, 불완전하고 생동감있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전 직장에서 최전무같은 사람도 오성식과장 같은 사람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최전무 타입은 부하직원을 힘들게 하지만 일을 딱 부러지게 해내기 때문에 업무에 도움이 되고 오과장 타입은 실무를 꼼꼼하게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인간적으로는 최전무 타입이 껄끄럽지만 명절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고마운 사람은 오과장이죠. 각각 약점과 단점이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미생'이라는 말에 동감할 수 밖에 없더군요. 장그래는 통찰력이 있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장점이 있습니다. 과연 장그래의 타고난 장점으로 실무 능력 부족이라는 약점을 돌파할 수 있을지 이 세상의 모든 미생(未生)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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