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미생' 7화를 보며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신 분들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경쟁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 경쟁 관계 속에서 불쾌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직장이니까 티는 못내도 속으로는 심한 내상을 입게 되는 경우도 많죠.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팀의 팀장이 퇴사하고 새로 팀장이 된 사람과 팀장 자리를 노리던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다음 팀장이 될거란 생각에 거들먹거리 적도 있으니 그럴만도 했겠죠. 상황을 대충 눈치챈 대표는 원래 경쟁을 부추키는 타입이었는데 딱히 팀 분위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상황을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지목하진 않았지만 불만있으면 그만 두라는 식으로 질책했습니다.
술취한 눈으로 '당신들이 술맛을 아냐'고 묻는 오과장.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술맛을 알아야한다.
동료가 퇴사하든 내가 짤리든 간에 양쪽 모두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대표의 바람과는 달리 팀 분위기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경쟁적으로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갈등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즐겁게 일하던 사람들도 점점 더 지쳐갑니다. 결국 대표가 누굴 지목해 그만 두라고 한 건지 눈치채지 못한, 가장 나이어린 여직원이 회사에서 긴장감에 질려 쓰려지고 컵을 깨트리더니 회사를 제일 먼저 그만두었습니다. 소수 인원으로 팀을 꾸린 곳이라 아무튼 한명은 사표를 냈으니 그럭저럭 분위기가 정리되나 싶었죠.
그러나 팀장 보다 더 높은 직책의 사람이 새로 팀에 합류하고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습니다. 한 직급 밀려난 팀장은 팀장대로 스트레스를 받은 반면 팀장 자리를 원했던 그 사람은 대표에게 한번 찍힌 것도 있으니 새로온 상급자에게 더욱 살갑게 굴었습니다. 일개 팀원의 입장에선 눈치 볼 사람만 더 늘어났습니다. 처음 모였을 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간질과 따돌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온 상급자는 사무실 분위기 파악 보다 성과에 더 신경썼고 잘해주는 사람의 말만 믿었죠. 그만둔 사람 때문에 업무는 늘어났는데 감정적으론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결국 그 팀은 일년 엔 기존 팀원 대부분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밖으로 보기에 제대로 굴러간 것은 대표의 끊임없는 질타와 최악의 상황까지 버틴 팀원들의 안간힘 덕분일 것입니다. 그 때의 경험은 적당한 직장 동료들 사이의 경쟁은 일의 효율을 높여 생산성을 높여주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이뤄진 경쟁과 갈등은 사람만 상하게 만든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역시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흔한 선배들의 말도 맞는 말이었고 직장은 역시 성취감 보다는 돈과 승진이 최고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미생'에서 김대리(김대명)의 대사처럼 말이죠. 사람사는 곳인데 사람사는 곳이 아닌거죠.
장그래(임시완)가 일하는 원인터에서 사람좋은 오상식(이성민) 과장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최고로 좋은 사람이고 겉으론 꽥꽥 소리를 질러도 자기 직원을 '우리 애'라며 챙겨줄 줄 아는 인간성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팀 간부나 팀원들이 밀려난 영업 3팀, 빽없는 영업 3팀, 승진 못하는 영업 3팀이라고 한번씩 되새기는 것은 일등을 겨루는 경쟁에서 일단 제쳐두기 위한 되새김이자 자기를 밟고 올라갈 생각하지 말라는 줄세우기 같은 것입니다.
오상식의 말대로 직장에서 '완생'이 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뭐든 잘 해낼 만큼 일도 잘 하고 승부사 기질이 있는 오과장은 매번 인사고과에서 물먹어 아직까지도 과장입니다. 실적 위주의 회사에서 영업2팀 고과장(류태호)은 영업2팀의 아이템 선정 경쟁에서 영업3팀을 이기기 위해 김부장(김종수)에게 차장 인맥을 대고 대접합니다. 자원팀은 지난 분기에 재무부장(황석정)에게 보류된 아이템을 안영이(강소라)에게 던져주며 어떻게든 쓸만한 아이템으로 만들어 보라 합니다. 정부장은 부하직원의 성공 보다 자신의 인사고과가 더 문제라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국 오과장은 아이템 선정에서 영업2팀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영업부에서 밀리고 자원팀에게 뺐기고 고달픈 오과장의 신세.
문제는 영업3팀의 아이디어는 결국 자원팀에게 넘어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부장은 같은 영업본부 내의 일이니까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영업팀 술자리에 얼굴을 비추고 영업3팀의 아이템이 괜찮다는 걸 알아본 최전무(이경영)는 그 아이템은 자원팀 일이라며 가져가 버립니다. 그 동안 오과장이 아이템 선정을 위해 들인 공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고 오과장이 인사고과를 위해 경쟁할 실적도 사라졌습니다. 오과장같은 사람은 일이 누구의 공이 되든 '무조건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 간의 경쟁에선 허리굽히고 아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부와 인맥이 직장인의 처세이자 먹이사슬의 생존 원리가 됩니다.
팀이란 건 이론적으로 부하직원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북돋워줘야하지만 '미생'에서 등장한 직장 선배들은 오히려 잘난 후배가 선배들을 치고 올라올까봐 전전긍긍합니다. 팀끼리 경쟁하기도 하고 팀내에서 경쟁하기도 합니다. 하대리(전석호)가 안영이를 들들 볶는 이면에는 자원팀 분위기를 따라오라며 길들이는 면도 있지만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안영이가 먼저 두각을 나타낼까봐 두려워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들이 안영이를 승진 라인에서 멀리 치우고 복종하게 만들려 선택한 방법은 여자라며 무시하고 뒷담화로 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장백기(강하늘)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는게 편하다고 조언했고 장그래는 일을 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했죠.
같은 팀내에서도 안영이처럼 더 뛰어난 사람을 경계하는 면이 있다.
안영이는 계속 비슷한 일에 맞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장백기의 말처럼 자원팀의 불합리를 받아들이고 수긍하면 말단 승진 라인을 타며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고 직장이 편해집니다. 마초 선배 직원들의 장단을 맞춰주고 김치 주문같은, 자원팀의 잡무를 처리하는 일이 때로 굴욕적이지만 최소한 눈물나는 모욕은 안할 지도 모릅니다. 장그래의 조언대로 일을 잘 해내면 일에 대한 성취감은 만족스럽지만 상사들은 여전히 안영이를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류된 아이템을 기어이 영업계획서에 넣게 만든 안영이의 능력이라면 장백기의 조언과는 다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할 요령을 얻게될 지도 모르죠. 그 요령을 배울 때까지는 더럽고 치사한 꼴을 많이 봐야할 것입니다.
'미생' 1회 때 거리를 걷는 장그래는 퇴근한 직장인들이 술집에 모여 불콰해진 얼굴로 '위하여'를 외치는 걸 무심히 바라봅니다. '아빠는 왜 매일 술을 마시냐'는 아들도 '건강생각해서 술 좀 줄이라'는 아내도 왜 밤이면 밤마다 거리에 술취한 사람이 많은지 이해 못하는 행인들도 술마시는 그 사람들이 회사에서 어떤 더러운 일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구토를 하면서도 지독하게 취한 오과장의 말대로 그 많은 사람들은 밥으로 채워지는 심리적 허기를 술맛으로 잊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매일 밤마다 접대를 위해 회식을 위해 아니면 지친 심신을 달래려 술집에 모이는 직장인들이 쓰디쓴 소주가 맛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직장인들이 밤마다 소주를 마셔대는지 바둑알같은 신세.
그러나 미생이 완생으로 나아가는 길에 정답은 없습니다. 아무리 라인을 잘 타도 윗사람 한마디에 토사구팽 당하는게 직장이고 팀의 상사가 좋은 사람이라도 인사고과에 밀리면 완생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는 일도 흔하죠. 아무리 발버둥쳐도 직장에서의 한 개인은 바둑판 위의 바둑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같이 직장생활을 한 동료와 경쟁관계에 놓였을 때 깔끔하게 처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직장이 원래 그런 곳이니 아부와 줄세우기를 한다고 대놓고 비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냥 술이나 마시는 거죠. 장백기와 한석율(변요한)이 마시는 한잔의 술, 장그래가 말없이 밥을 먹으며 느끼는 심리적 허기와 아내의 걱정에 '당신들이 술맛을 아냐'며 중얼대는 오과장. 어쩌면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술맛부터 배워야하는 것은 아닌지 쓰디쓴 소주 한잔을 달게 느껴진다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옵니다(아 그러고 보니 요즘 프리미엄 소주는 원래 달게 만들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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