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들이 직장에서 만나게 되는 상사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소위 진상이라 불리는 상사부터 직장생활 몇년이 지나도 기억나는 좋은 상사까지 직업의 종류 만큼이나 상사의 성격도 다양하죠. 그래서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신입사원 각각이 이겨내야하는 상사와의 갈등을 한판의 바둑에 비유하곤 합니다. '미생(未生)'이라는 드라마 제목의 의미처럼 완벽한 사람도 완전한 만남도 없으니 상사라고 해서 업무의 모든 걸 알고 있으리란 법이 없고 부하직원에게 많은 걸 가르쳐줄 수 있을 리도 없습니다. '미생'의 네 신입사원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상사들을 만나 각기 다른 방법으로 바둑을 둡니다. 그들의 바둑은 몇수 접고 시작하는 하수의 바둑이라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갑을 관계와 비슷해 안타까움을 줍니다.
오과장은 박과장을 상대로 감사를 단행하고 장그래는 중동 현지회사가 박과장이 만든 유령회사임을 밝혀낸다.
한석율(변요한)은 모든 일을 떠넘기는 성대리(태인호)로 인해 하루하루가 피곤합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출장을 가고 새벽업무와 밤근무를 책임전가하는가 하면 쪼잔하게 커피값 조차 떼먹는 성대리로 인해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한석율은 평소 뺀질거리던 모습과 다르게 대처를 못하고 오히려 성대리의 질책을 받습니다, 안영이(강소라)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이 불만인 하대리(전석호)로 인해 사무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콩쥐 신세가 됩니다. 그나마 강대리(오민석)로 인해 기본이 안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장백기(강하늘)는 나름대로 철강팀의 업무 파악을 위해 '잡일'을 하러 나섰죠.
그럭저럭 오상식(이성민) 과장과 업무를 해나가던 장그래는 새로온 박과장(김희원)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했습니다. '고졸'이라며 인신공격하는 건 다반사고 안마나 슬리퍼 심부름같은 각종 잡무에 다른 직원들 앞에서 창피를 줍니다. 오과장이나 김대리(김대명)가 거들어줘봤자 박과장의 악행은 어디까지나 장그래가 감당할 몫이었죠. 한석율의 표현대로 장그래는 아무나 차는 축구공, 안영이는 콩쥐, 장백기는 푹절은 배추, 한석율은 호구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치열한 직장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 만의 '바둑'일 뿐 그들 중 하나가 낙오되거나 퇴사한다고 해서 원윈터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최전무(이경영) 라인으로 인맥은 든든하지만 성실하지 않고 사고뭉치인 박과장은 어느날 갑자기 영업3팀에 배정됩니다. 정과장(정희태)을 비롯한 사람들은 박과장의 중동사업계획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지만 자신들이 직접 그 끝을 밝혀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평소 '신념' 운운하던 오과장은 장그래와 김대리를 괴롭히고 일도 하지 않는 박과장을 김부장(김종수)과 상의해 조사하기로 합니다. 장그래와 김대리는 서류를 점검하러 나섭니다. 오과장의 바둑두는 법은 그렇듯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을 마주쳤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최전무와 사이가 좋지 않고 오과장에게 오락가락하는 김부장 덕분에 영업2팀 고과장(류태호)에 비해 오과장은 항상 찬밥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던져진 시한폭탄이니까 더욱 큰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터트리는 것이 맞지만 박과장의 징계는 김부장의 직위와 오과장의 입지까지 흔들리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과장은 성희롱까지 저지른 박과장을 남들에게 떠넘길 수가 없습니다. 박과장의 비리는 엄연한 사기고 위법이나 예고편을 보면 최전무는 박과장을 어떻게든 살려줄 것같습니다. 오과장의 정공법으로 인해 또다른 위기의 문을 열게 된 셈입니다.
박과장을 건드리면 곤란하다는 걸 알지만 오과장은 처리하기로 한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큰 폭탄이 되어 터지고 직접 터트려도 문제가 생기는 박과장이란 인물이 영업3팀으로 온 자체가 오과장 최고의 불행이지만 어쨌든 오과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합니다. 그게 오과장이 가진 책임이고 오과장이 선택한 '대국'인 셈입니다. 김대리와 대화하는 장그래의 말처럼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고 '바둑 한판 이기고 져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이 없'지만 그것이 오과장이 오과장의 인생이고 오과장의 바둑이기 때문에 그는 최선을 다합니다. 아무리 처절하고 치열해도 어쨌든 그 사람에게는 '나의 바둑'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왜 이렇게 치열하게 바둑을 둘까. 답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입사원들은 자신들 앞에 닥친 위기를 두고 계속 고민합니다. 장그래는 자신이 과거에 바둑을 뒀다는 걸 알고 있는 좋은 선배 김대리가 있고 장백기의 경우 그나마 강대리가 악감정을 가지고 그를 무시한 것이 아니기에 운이 좋지만(오히려 강대리는 장백기에게 최고의 상사라 할 수 있죠) 한석율이나 안영이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석율이 하대리를 상대로 둔 한수나 안영이가 쌍욕을 퍼붓는 하대리를 상대로 둔 한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최선을 다한다는 그들.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박과장이 회사를 상대로 사기치려 했던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박과장은 한때 회사일을 열심히 하며 이천만불 계약도 따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그에게 건내준 것은 회식을 위한 법인카드 하나였습니다. 적절한 보상도 없고 보람도 없는 그 바둑을 왜 둬야하나 싶고 '내가 영업하는대로 내 돈'이 되는 그런 판을 새로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박과장은 회사와 동료들를 상대로 치열한 바둑을 두었고 자신이 다면기(多面棋)에 능한 고수라 생각했지만 흑돌을 둔 장그래에게 제대로 지고 맙니다. 그러나 최전무를 등에 업고 다시 대국을 시작한 박과장의 판이 장그래에게 또다른 대국이 되겠죠.
몇수 접고 시작하는 나는 세상을 상대로 어떤 바둑을 두는 게 옳을까. 박과장의 대국처럼 얕은 수를 써볼까 아니면 오과장처럼 정공법을 써야할까 장그래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허점을 노리는 작전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면 안영이처럼 답이 없어 보지만 한알한알 집을 만들어가는게 좋을까요. 딱 부러진 정답도 없고 딱 알맞은 훈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바둑 한판 이기고 져도 그건 그냥 바둑일 뿐 내일 또다른 대국을 치러야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결국 후회없는 대국을 치렀느냐 아니냐에 대한 답은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자기 자신만 알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래봤자 바둑'이라서 편법을 선택한 박과장. 내 바둑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 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세상일까?
확실한 건 앞으로 영업3팀의 앞길이 더욱 험난해졌다는 것입니다. 고졸 검정고시라며 무시받으면서도 박과장의 영문 이름이 제임스 박이고 중동의 현지 회사가 박과장이 만든 유령회사라는 걸 정확히 지적해낸 장그래와 최전무 라인의 박과장을 직접 쳐낸 오과장은 한동안 내부고발자로 찍혀 알게 모르게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한집을 이길 때는 속이 시원했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내 바둑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과 신념 만으로 버텨내기는 힘든 나날이겠죠. 그래도 처절하고 치열한 바둑을 두는 이유는 알고 있는 편이 더 나은 것일까요? 아니면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게 나은걸까요. 그 질문에는 아무도 쉽게 답을 할 수 없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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