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인상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다른 외골수들은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이면 음악 공학이면 공학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집요하게 그 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주제로도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그런 태도가 조금 달라진다고 한다. 어느 분야든 그 끝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 젊을 때는 말이 통하지 않던 그들도 마치 오랜 시간 사귄 친구처럼 깊이있는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 마다 그 출발점은 달라도 끝에는 결국 한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 - 그것이야 말로 인생의 재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에 출연해 인터뷰를 가진 배우 한석규. 두 사람의 연륜이 느껴지는 깊이있는 대화였다.
단독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다는 배우 한석규가 JTBC '뉴스룸'에 출연했다. 그 자체로도 주목할만한 일인데 흥미롭게도 영화배우 한석규는 손석희 앵커에게 '선배님'이란 호칭을 쓴다. 생각해보니 한때 두 사람이 MBC 공채 탤런트와 아나운서로 한 회사 식구였던 적이 있다. 80년대는 지금처럼 배우가 기획사에 소속되던 시대가 아니라 공채 탤런트로 방송사를 직원처럼 드나들던 시기니 '선배'라는 호칭이 그럴만해 보인다. 같은 방송계 종사자이기도 하고. 그러나 한석규의 TV 출연작은 생각 보다 많지 않다. 단역으로 출연한 드라마까지 포함해도 모두 10여개 뿐. 한석규는 생각 보다 빨리 TV를 떠났다.
과거 어떤 기사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한석규가 90년대 중반 TV를 떠나 영화판으로 자리를 옮기고 TV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던 이유는 쉴틈없이 진행되는 드라마 촬영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영화촬영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니 이 말은 고생하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여유없이 바쁘게 몰아치는 TV 드라마 촬영방식이 안 맞았다는 뜻이리라. 물론 90년대 후반 한석규는 '넘버3(1997)', '쉬리(1999)'를 비롯한 여러 영화로 한참 자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TV로 눈길을 돌리고 싶어도 영화판에서 절대 놓치지 않았으리라. 연기 이외의 것에 눈돌리지 않는 외골수라서 그랬을까? 그때도 한석규의 인터뷰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이제는 그때 보다 좀 더 여유있어 보이는 한석규 - 손석희 앵커와의 대화는 물흐르듯 잔잔했다. 손석희 앵커가 한석규를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 평가했듯 손석희 앵커도 방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었다. 이렇게 좋은 인터뷰는 '뉴스룸'이 아닌 어떤 곳에서도 시청하기 힘들다. 요즘 '미생'에서 오차장(이성민)이 장그래(임시완)에게 써준 '더할 나위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는 사람도 많다던데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대화는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진지함이 있다.
한석규는 처음에는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는 배우라서 그런지 손석희 앵커 앞에서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석희 앵커에 질문에 답하는 한석규에게선 곧 프로다운 배우의 모습이 풍겨나왔다. '사극이 배우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는 한석규, 그의 영화를 보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꽤 오래전 가졌던 의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영화판에서 성공을 이루고 '전성기' 때 쉬었던 이유를 '달떠 있었다'고 했고 '구닥다리가 될까봐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배우는 나이먹는 걸 기다리는 직업'이라는 멋진 대답을 했다.
외골수로 한길만 걸어온 사람들의 깊이있는 대화.
그중에서도 가장 멋있는 대답은 '인기'에 대한 한석규의 비유였다. 한석규는 '대중문화를 하는 연예인들이라면 인기같은 걸 의식할 수 밖에 없다'는 손석희의 질문에 '인기는 곧 젊음'이라 말한다. '젊음은 좋지만 달떠 있고 불안하고 우울하다'는 그의 해석은 집착하던 젊은 시기를 지난 외골수 인생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한가지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목표가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기도 한다. 배우가 외모나 인기에 집착하고 흥행성적을 목표로 삼기 시작하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본질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배우 한석규는 그 시기를 지난 외골수 인생의 평온함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그런 시기를 지나왔노라 말이다.
그에 대한 손석희 앵커의 응수는 놀랍도록 재치있다. 내년이면 만으로 50이라는 한석규의 대답에 '저 따라오시려면 아직 멀었다'는 손석희. 한석규가 한 시기를 지나 자신 만의 시간으로 들어섰다면 손석희도 방송인으로서 그 시기를 넘겼다. MBC라는 같은 방송사 출신이 아니라도 같은 방송계에서 한 우물을 파는 그들이기에 10여년의 나이 차이와 '선배'라는 호칭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MBC 아나운서로 데뷰해 토론 프로그램의 최강자로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대명사로 자리잡기까지 손석희 앵커 역시 쉽지 않은 길을 걸었다.
배우는 나이먹는 것을 기다리는 직업이란 말에 동감할 수 밖에 없었던 인터뷰. 연륜이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요즘은 다시보기나 팟캐스트로 TV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뉴스룸' 시청률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한석규가 이제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배우 반열에 올랐듯 손석희 앵커 역시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언론인이겠지만 한석규라는 배우가 출연하면 '믿고 보는 드라마'가 되듯 방송계에 손석희 앵커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든든한 시청자들이 있다. 어제 인터뷰가 다른 '뉴스룸' 인터뷰 보다 특별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생 외골수로 한길만 파던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남다른 유대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어쩌면 사적으로도 대화가 잘 통할 것같다.
손석희의 칭찬대로 한석규는 배우 중에서도 발성이 안정되고 울림이 좋은 편인데 역시 성우 출신이라는 과거가 배우 활동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같다. 발성이라는 기본도 안 배우고 데뷰하는 연기자들도 많으니까. 84년 강변가요제에서 '덧마루'라는 이름으로 출연했을 때의 노래를 듣고 싶다면 3년전쯤에 썼던 포스팅을 소개한다(명품연기자 한석규에게 이런 시절이). 대부분의 배우들이 나이먹는 것을 의식해 얼굴을 고치는 시대에 이런 배우라면 배우는 나이먹는 것을 기다리는 직업이라는 말에 충분히 동감할 수 있을 것같다. 또한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에서 이런 깊이있는 인터뷰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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