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무한도전'의 시청률이 22.2%를 넘었단다. DMB 시청률은 80%를 넘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대박이다. 이미 한참전에 한물간 90년대 대중가요로 이 만큼의 놀라운 반응을 끌어낼 줄은 몰랐다. 활동 당시와 다름없는 기량을 선보인 가수들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고 아주 간만에 TV에서 만난 그들의 모습에 칭찬 일색이다. 이제는 쉽게 볼 수 없게된 가수들의 무대 하나하나가 주목받았고 방송시간이 너무 짧았다며 벌써부터 시즌2를 요청하는 시청자들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90년대 추억팔이'에 불과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고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들의 공연이 좋았던 이유를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주 오랜만에 무대 위에서 본 그들이 반가웠고 즐거웠을 뿐.
마지막 출연자였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토토가'의 출연진 모두가 함께 불렀다.
정작 그들 가수들이 인기를 끌고 활발한 가수 활동을 하던 때에는 난 가요 보다는 팝을 듣던 시기였다. 90년대는 8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 음반도 구하기 쉬웠는데 락을 좋아하던 당시의 내 취향이 아무래도 그 시대 인기가요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지 - TV와 거리에서 자주 듣던 음악이라서 그랬을까 - 10팀 모두의 음악이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즐겨듣지 않던 노래가 이제 와서 이렇게 반가운 걸 보면 '토토가'의 인기는 단순히 추억의 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같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립지 않은게 한가지도 없다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요즘엔 추억거리를 하나둘 곱씹으면 늙은 거라는데 '토토가'를 보고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추억이란게 원래 좀 그렇다. 맛좋은 음식을 먹었던 기억에 다시 찾아가면 간판이 바래거나 주인의 손맛이 바뀌어 예전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아예 그 장소가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은 더 그렇겠지. 한때 유쾌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다시 만나면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사람으로 변해버린 경험도 있을테고 좋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 예전처럼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은 경험도 다들 한번씩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토가'는 그런 빛바랜 추억과는 많이 달랐다. 정말 그때의 가수들이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예전의 경험을 그대로 돌려준 느낌이었다.
물론 그들이 완전히 예전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핑클'처럼 섭외 과정에서 조건이 안 맞아 함께 할 수 없었던 팀도 있었고 '룰라'처럼 아예 섭외 조차 할 수 없는 팀도 있었다. 故 신해철처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이제는 나이먹어 중년이 된 출연 가수들의 모습이 과거와 완전히 똑같았다고 하기는 힘들겠지. 만년 요정일 것같던 SES 슈는 아이엄마가 되어 무대 위에서 춤추는 열정을 잊고 산지 오래였고 유진은 임신중이라 무대에 함께 할 수 없었다. 나이 오십이 가까운 쿨의 김성수는 숨이 차서 헉헉대면서도 딸아이의 응원 모습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간만에 무대에 오른 터보의 김정남은 아저씨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한때 90년대 가요계에서 전성기를 맛본 팀들이라서 그랬는지 그들의 공연은 절대 실망스럽지 않았다. 각자의 장르에서 한번씩 최고의 자리를 누려본 가수들이라 그랬을까. '토토가'에서 시청한 무대가 좋은 기억을 훼손시키는, 빛바랜 추억이었으면 이 정도까지 열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힘겹게 불러온 과거의 추억이 손맛이 변한 요리사의 실력처럼 실망스러웠다면 많은 시청자들이 이렇게까지 응원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토토가'가 그냥 흔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수준높은 추억 방송이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수준높은 추억방송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의 반응은 없었을 것이다.
90년대를 연상시키는 제작진의 사전준비도 공연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사전에 신청받은 관객들에게 90년대 의상 코스프레를 선보이게 했고 가수들의 활동당시 자료화면도 충분히 준비했다. 가수들도 당시의 무대의상과 댄스팀을 잘 맞춰왔지만 제작진은 90년대식 무대 연출이나 카메라 연출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소 번거로울 수도 있는 이정현이 기획한 무대도 딱 맞춰 준비해줬다. 요즘 보아도 촌스럽지 않은 이정현의 '와' 퍼포먼스는 '무한도전' 제작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SES하면 여자 아이돌의 원조급이고 이정현은 테크노 퍼포먼스 여왕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고 당시엔 흔하지 않던 힙합을 선보인 지누션, 아름다운 발성의 발라드 황태자 조성모, 한국의 마돈나 엄정화, 독특한 음색의 레게 음악을 선보인 김건모 등 요즘과는 다르게 그때는 지금 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있었다. 대중가요의 특성상 장르의 전문화를 꿈꾸기는 힘들었던 시대지만 분명히 서로 색깔이 다른 가수들이 있었다. 요즘은 가수는 기획사에서 훈련받고 컨셉에 따라 곡을 받는다는 암묵적인 절차가 생긴 시대다 보니 그 시절 보다는 다양성 면에서 좀 떨어지는 면이 있다. 데뷰 무대를 봐도 그냥 가수 보다는 아이돌이 더 많은 시대기도 하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특별했던 90년대
'무한도전 - 토토가'는 30, 40대 뿐만 아니라 90년대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20대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90년대는 좀 더 특별했던 것같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조금씩 자유로워진 문화적 분위기에 개성을 추구하던 'XX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 유선전화가 아닌 삐삐가 대중화되고 곧이어 누구나 한대씩 핸드폰을 들고 다니던 그 시절 - 그 시대의 풍요로움은 IMF라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삼포세대로 대변되는 요즘의 젊음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요즘의 사회분위기가 90년대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한 것일까?
물론 누구나 젊은 시절이 나이든 지금 보다는 좀 더 자유로웠고 살기 좋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의 60-70대는 70년대를, 50대는 80년대를. 30-40대는 90년대를 추억할 것이다. 지금 '토토가' 무대에 열광한 사람들 중에는 90년대의 그 노래들이 히트했던 시절에 행복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금과 똑같이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금 보다 오히려 불행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무한도전 - 토토가'를 보고 나니 개개인의 그런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과는 별개로 어쩌면 90년대에 정말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 그 시대의 에너지 '무한도전'을 시청하면서 우리 모두 그 에너지에 공감한 것은 아닐지 - 콕 집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를 그렇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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