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시골집에 내려왔는데 이곳은 너무 추워 감히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 동네 대부분 집들은 기름 만으론 따뜻하게 지낼 수 없어 심야전기, 연탄, 나무 보일러를 함께 돌려 이중 난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여유되는 집은 그렇게 대책을 세워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사는 오래된 가옥들은 올겨울 유난한 한파에 보일러가 고장나고 수도가 동파되었답니다.
추운 겨울을 어떻게든 지나야 맘놓고 고칠텐데 공사해줄 사람들도 마땅치 않으니 어르신들이 난방 잘 되는 마을 회관에 모여 잠을 자기도 하고 추렴한 돈으로 식사를 하신답니다. 평생 올해같은 추위는 첨이라는 말에 피난온 것같은 처지가 옛날 생각도 나시나 봅니다. 요즘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나마 매일매일 굶고 사는 집은 없으니 정말 까마득한 예전 이야기지요.
1983년 MBC에서 방영되던 '간난이'라는 일일드라마는 휴전 이후 한국인들의 간난(艱難)을 묘사했던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장담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딸아이에게 이름도 제대로 지어주지 않던 시절이라 갓 낳은 아이란 뜻의 간난이란 이름을 가졌던 소녀들이 지금은 70-80대 노인들이 되셨겠지요. 80년대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더욱 그 드라마에 공감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란 말을 했단 역사적 사실은 없습니다만 요즘 아이들은 굶어죽었다는 그 시대 이야길 들으면 '왜 굶어, 라면 먹으면 되지'라고 반응합니다. 그 시대 아이들이 왜 밥을 굶고 학대에 가까운 일상을 겪어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극단적 생존 본능만 남은 가난의 시대를 체험해보지 못했기에 세대가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민며느리로 들어갈 뻔한 간난이
제대로 일도 할 수 없는 기력이 쇠하신 할머니, 철부지 동생 영구(김수용)와 사는 간난이(김수양)에겐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 난리 통에 총에 맞아 죽은 아버지와 그런 전쟁의 참상을 보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어머니. 어머니 순녀는 미쳐서 여기저기 떠돌다 간혹 마을에 들리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는 어머니는 없는게 낫다 싶을 정도로 간난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 지게미를 먹고 취하고 간간이 타먹을 수 있는 급식에 목을 메고 마을 좀 살만한 집에 식모살이하고 하녀살이하는 간난이는 간신히 얻은 먹을 것도 종종 어른들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간난이가 똘똘하다며 거두어 일을 시키고 친절하게 굴다가도 이내 욕심을 드러내고 사나운 심성을 드러내는 어른들 사이에서 동생과 할머니를 건사해야하는 간난이는 씩씩하게 견디어 내곤 합니다.
전쟁 이후 굶기가 일상인 마을 사람들은 제 살기도 바빠 고아 두 남매까지 살필 여력이 없습니다. 전쟁 때 떨어진 탄피를 주어 돈으로 바꿀 생각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피를 줏으러 여기저기 떠돌고 간만에 얻어먹는 밥이 있으면 말 그대로 배터지게 먹다 배탈이 납니다. 마을에 돈이 없어지는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두 남매를 제일 먼저 닥달하고 밥을 곯게 합니다.
밥 얻어먹고 살라고 더부살이를 시키고 상대가 어린아이건 말건 모질게 밥값하라는 사람들, 한때 콜레라에 걸린 간난이는 개울가에 버려지지만 어떻게든 살겠다고 버텨 살아나기도 합니다. 머리에 이를 잡아야할 정도로 더럽지만 청결 문제는 뒷전이고 어린아이의 죽음 따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 거친 곳에서 간난이는 무던하게 견뎌냅니다. 쌀밥 구경도 못해보고 자동차와 전기가 뭔지 모르고 살지만 그딴 것 신경쓸 새가 없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결국 어머니 때문에 살던 마을을 떠난 남매와 할머니, 간난이는 이번에도 야무지게 남의집살이를 하지만 간난이를 칭찬하던 주인집은 간난이를 거두어 그집 모자란 아들과 짝지워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해줄 사람없는 간난이의 수난은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동생과 처지가 어려워지자 동생이라도 배불리 살라고 미국으로 입양보냅니다.
가난을 공감하지 못하는 시대
드라마 '간난이'는 이재우 극본 고석만 연출로 큰 인기를 끌자 성인이야기로 뒷부분을 채웁니다. 영구역을 맡았던 김수용씨가 워낙 특이한 외모라 성인 영구역을 당시 인기있던 코미디언 김명덕씨로 선정했지요. 연기를 그닥 못하신 건 아닌데 코미디언 이미지 때문에 한동안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간난이의 성인역을 맡았던 원미경씨도 연기를 잘 했지만 어린 배우들의 잔상이 워낙 강해 애먹었지요.
그당시 시청자들에게 어른들의 고난은 매력적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험난하던 정치권은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 뿐이었고 예전 보다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부동산 투기 등이 시작되어 빈부격차의 조짐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어른들은 여전히 바쁘고 정신이 없었으니 굳이 TV에서까지 그 모습을 볼 건 없었던 게지요.
주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간난이 역의 김수양씨는 종종 리포터로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김수용씨는 현재 뮤지컬 배우로 활약하며 '황금사과'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코미디언 김명덕씨와 원미경씨의 모습도 종종 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인 영구역의 김명덕씨는 이 드라마 출연 덕에 이후 예전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 같네요.
현대인의 가난은 정신적 가난이라고들 말합니다만 물질적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내일 당장 먹고살 것이 없다 걱정하는 사람들 앞에 시대가 냉정하기만 합니다. 누구나 가난했고 헐벗었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나눠준 밀가루로 해먹을게 마땅찮아 수제비를 끓이고 버린 걸 모아 부대찌개를 끓이고, 죽을 배급할 때 건더기는 맨 마지막에 준다는 이유로 앞자리에 서길 거부했던 시절.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음과 없음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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