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빛과 그림자

빛과그림자, 국민 바보 영구를 탄생시킨 TV 드라마 '여로'

Shain 2011. 12. 2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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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가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는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 명암이 선명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백수가 된 후에도 밝음으로 똘똘 뭉친 강기태(안재욱)와 서서히 눈떠가는 쇼비지니스의 즐거움, TV 드라마와 화려한 조명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흥겨움이 성탄절 트리 불빛 만큼이나 반짝이는가 하면 당시의 공포스럽고 억압적인 시대분위기가 그대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중정 미림팀의 '연회'에 불려갔던 이정혜(남상미)를 집으로 데려다 주던 차수혁(이필모)의 차를 막아선 야간통행금지 바리게이트는 1982년 이후에나 사라진 풍경입니다.

세븐스타 쇼단의 노상택(안길강)은 유채영(손담비)같은 잘 나가는 연예인들을 재벌 후계자들과 만나도록 유도하고, 장철환(전광렬)의 연회에 불려나가는 소위 '가수들'은 당시 실제로 있었다던 '채홍사'의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순양극장 공연을 펑크내고 도망쳤던 빛나리 쇼단 단장 신정구(성지루)가 강기태에게 쫓기다 경찰들에게 잡힌 이유는 국기 강하식을 하는데도 가슴에 경건히 손을 얹고 멈춰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멈춰서서 한곳을 응시하는 그곳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신정구와 강기태가 달리는 그 모습, 과연 어제 방송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 합니다.

국기 하양식에 멈춰서지 않아 잡힌 신정구와 미림팀의 장철환.

70년대 초반의 풍경, 그때가 그랬습니다. 전국적으로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한 마을이 늘어가고 TV 보급도 조금씩 늘어나던 그 시대,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던 쇼단은 쇠락하고 바야흐로 TV의 전성기가 왔습니다. TV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앉아 드라마를 시청하며 울고 웃고 국제적인 명경기가 방영되면 같이 응원하던 시절. TV 드라마 '여로'의 주인공이던 장욱제는 병역비리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었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정계에서는 고위층만 상대했다던 마담 '정인숙'이 총격을 받아 죽었다는데 TV의 불빛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TV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여로'는 착한 며느리와 악랄한 시어머니, 그리고 바보 남편의 이야기로 요즘도 종종 반복되는, 진부한 소프 오페라의 전형입니다만 당시 그 드라마의 시청률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중파와 케이블이 다양한 요즘 시대와 70년대의 시청률을 비교한다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7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니 대한민국 사람 열명 중 일곱은 시청한 드라마라 봐도 좋을 듯합니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는 지금 TV가 사람들을 움직이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TV 시대의 전성기를 알린 '여로'의 영향력

우리 나라가 처음 TV를 생산한 건 66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74년에는 무려 13개 회사에서 TV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생산규모가 100만대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도 그때라고 하지요. 그 이후 1980년에는 처음으로 컬러방송을 시작하고 컬러 TV도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샐러리맨'의 월급이 2만원이던 시대이니 6만원대의 TV는 상당히 고가의 물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TV를 사기 시작하고 TV 앞에 사람들을 앉힌 드라마가 바로 '여로'와 '아씨'같은 드라마들이고 방영 이후 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로'가 미친 영향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 방영된 장면은 등장한 주인공들의 재회 장면 이었습니다. 그 장면에 감동받은 한 가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사가 실리는가 하면 극중 바보 남편 역할을 하던 '영구(장욱제)'를 따라하는 아이들이 문제라며 신문 기사가 실리기도 합니다. 기계충 때문에 땜빵이 난 머리에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남편 영구, 시어머니(박주아)에게 쫓겨난 아내 분이(태현실)를 기다리는 그의 순정은 전국민을 울리기도 했지만 배꼽 잡고 웃게도 했던 국민 바보 캐릭터였습니다.

드라마 '여로'의 배우들, 박주아, 최길호, 장욱제, 최정훈, 송승환, 태현실.

1972년 12월 29일 드라마 '여로'는 211회로 마무리됩니다. 주인공 영구 역의 장욱제는 영구의 임펙트가 너무 강해 다른 배역을 맡기 힘들어 77년 은퇴를 했지만 '여로'에 출연했던 태현실, 최정훈(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할아버지 역으로 출연하신 그분), 송승환 등은 여전히 연기활동 중입니다. 독한 시어머니 역할을 멋지게 해내 공수부대원들에게 살해 협박을 당했다던 배우 박주아는 올해 5월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여로'를 보고 나서 극장 공연을 계속했다는 말이 '사실'이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제는 그런 인기를 누리는 드라마는 나오기 힘들겠지요.

사실 이 드라마는 72년에 방영된 드라마이기 때문에 70년대생들은 대부분 이 드라마를 소문만 들었지 직접 시청한 세대가 아닙니다. 7-80년생들 중에서는 그런 이유로 '바보 영구'가 심형래의 고유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있더군요. 심형래는 땜빵머리와 멍한 얼굴로 코미디 프로에서 '영구없다'같은 유행어를 유행시키기도 했고 1986년에는 '여로'라는 리메이크 영화에 장욱제가 맡았던 영구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그의 영구 캐릭터는 최근 영화 '라스트 갓파더(2010)'에서도 재현될 정도였으니 '여로'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끊기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방에서 파리만 날리며 기약없는 공연날짜만 기다리는 신정구와 여전히 잘 나가는 쇼단을 운영중이지만 탑스타가 된 최성원(이세창)의 인기에 파워가 줄어든 노상택 단장. TV 드라마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그들의 쇼는 잠시 중단되었어도 유채영과 강기태, 차수혁과 이정혜의 운명적인 사랑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뭔가 파트너는 바뀐 것같아도 일단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모양이네요. 영화배우가 된다는 정혜와 쇼비지니스에 합류할 강기태는 어떤식으로 엮이게 될까요.

70년대 연예계의 빛이 영화 출연과 TV 출연이었다면 어두움은 정치계와 화류계, 그리고 스폰서를 받는 일 아니었나 싶습니다. 장철환이 활약하는 미림팀은 어린 배우 이정혜가 감당하기는 너무도 벅찰 만큼 무시무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차수혁이 이정혜의 가림막이 되어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대의 무거움을 완전히 감당할 수는 없겠지요. 참, 극중 유채영이 집에서 강기태와 마시던 술이 '시바스 리갈'입니다. 그 술과 70년대의 연관성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렇게 명암이 극명한 드라마가 짜릿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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