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퓨전사극 흥행공식에 자리잡은 '스파르타쿠스'

Shain 2012. 2. 2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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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은 하나의 고유 장르로 꽤 오래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역사를 연극이나 드라마로 즐긴 역사가 오랜 만큼 그 형태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과거를 그대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워했지만 어느새 작가의 창작과 역사가 결합된 형태로 변형되어 갔습니다. 최근엔 '해를 품은 달'처럼 '사극'이라 부를 수 없는 형태의 '시대극'까지 사극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통 사극'도 일정 부분 창작이 포함되기 마련임에도 과거엔 제약이 많았던 반면 최근엔 팩션(Faction)이 보편적입니다.

그동안 제작되었던 한국 사극은 '역사적 사실'과의 관계에 따라 크게 네가지 종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오백년(1983, MBC)'같은 역사 재현에 충실한 연대기식 사극, '용의 눈물(1996, KBS)'처럼 연대기순으로 진행하되 작가의 시대관이나 가치관을 반영한 영웅사극, 이병훈 PD가 주로 제작하던 '허준(1999, MBC)'처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배경이지만 내용의 반이상은 창작된 이야기사극, '추노(2010, KBS)'처럼 시대는 과거이나 등장인물이나 사건 자체가 가상인 시대극 등이 있습니다.

1971년 '장희빈(윤여정, 박근형)' 2010년 '동이'의 장희빈(이소연).

때로는 이런식으로 구분이 안되고 제작자나 방송국에 따라 그 특징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퓨전 사극'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고증된 복식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현대적인 느낌의 화려한 의복에 현대어 억양을 사용하는 사극이 늘어났습니다. '공주의 남자(KBS, 2011)'같은 멜로, '뿌리깊은 나무(SBS, 2011)'같은 추리가 결합된 형태도 있습니다. 반면 KBS 주말 사극들은 내용의 대부분이 창작된 사극임에도 복식이나 배경 고증에 유달리 신경을 쓰고 '사극 발성'이 안되는 연기자는 아예 출연을 시키지 않는, 정통 사극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선 시대 사극은 '조선왕조실록'이 90년대에 완역되는 덕에 '정사' 중심의 사극 제작이 늦춰진 편입니다. 70년대에는 '임금님의 첫사랑(TBC, 1975)'이나 '장희빈(MBC, 1971)'처럼 구전으로 떠돌던 야사를 드라마화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각종 가채나 복식 고증도 요즘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고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이 '틀리게'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68년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실록'(1993년 완역)과 '신봉승' 작가를 비롯한 여러 사극 작가들의 노력으로 80년대에 연대기식 사극이 제작되고 그 뒤로 사극은 그 영역을 넓히게 됩니다.



영웅 사극의 필수코스가 되버린 노예와 전투장면

한 나라를 건국한 건국 영웅의 일대기를 다룬 영웅사극과 달리 '허준'이나 '대장금'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이 짧은 위인들입니다. 몇가지 업적이 적힌 것 외에는 거의 내용이 전무합니다. MBC의 '허준'은 창작형 사극의 플롯을 완성한 사극으로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위인 사극의 기본 구조를 이 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타고난 출생으로 인한 어린 시절의 고난, 동료들과의 우정 등 성공을 위한 발판 마련, 운명적인 연인과의 사랑이나 라이벌이 엮인 삼각관계, 경지를 넘어선 완벽한 인물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는 단계로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이때 완성됩니다.

'대장금(MBC, 2003)'은 '허준'에서 보여준 한의학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가 하면 흔히 보기 힘들었던 수랏간 궁녀들의 이야기를 가미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실록'에 몇 부분 언급된 것에 지나지 않던 '서장금'이 수랏간 나인에서 임금의 병을 전담하는 내의원 어의녀로 성장하는 과정은 퓨전사극의 교과서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뒤에 등장한 사극들은 '허준'에서 등장했던 액션의 강도를 높인다던가 당시 유행하던 '글래디에이터(2000)'같은 영화 분위기를 많이 가미하게 되지요. 새로운 소재의 사극을 시도하는 노력은 2000년대 초반부터 더욱 다양해집니다.

퓨전사극의 교과서격인 '허준'과 '대장금'

이병훈PD는 그 이외에도 '상도(MBC, 2001)', '서동요(2005, SBS)' , '이산(2007, MBC)', '동이(2010, MBC)' 같은 다양한 창작사극을 제작하며 자신 만의 특별한 색깔을 완성해 갑니다. 당시에는 세계적으로도 역사를 재해석해 그대로 화면으로 옮기던 과거 사극과 달리 역사 속 한장면을 독특하게 각색하여 보여주는 '퓨전'이 대세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러셀 크로우의 '글래디에이터'나 '엘리자베스(1998)'같은 영화들은 Faction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예전같으면 왜곡이고 허황된 이야기라 평가했을 야사 중심의 이야기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에는 '허준'의 플롯에서 한단계 더 발전해 주인공이 무술을 선보이는 이야기가 창작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극에 주인공으로 '노예'가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역적으로 기록된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해신(2004)'이 시작 아니었을까 합니다. 장보고는 출신이 미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막아낸 역사적 인물입니다. '해신'은 장보고와 염장(송일국), 자미부인(채시라)의 갈등 그리고 주인공들의 검투와 영웅담을 볼거리로 만들어냅니다. 이때부터 사극 주인공들의 '노예'시절은 한번씩 거쳐야할 필수코스가 됩니다.

노예로서의 고난과 검투장면 드라마 '해신(2004)'

주인공을 '노예'로 전락시키면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노예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쉽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지독하게 매를 맞거나 노예살이하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볼 때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주인공이 허기를 느낄 땐 같이 배가 고파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노예로서의 삶이 끝날 때 쯤엔 단단한 신체와 무술실력으로 웬만한 불한당은 얼마든지 쓰러트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에 각종 '액션'을 추가시킬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노예 소굴을 탈출한다는 부분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장점'들을 활용해 '연개소문(2006)', '대조영(2006)', '김수로(2010)', '계백(2011)', '광개토태왕(2011)' 등의 '영웅'들이 한 때 노예였던 과거를 갖게 됩니다. 이와는 좀 다르지만 '근초고왕(2010)'은 고구려 미천왕처럼 소금장수 일을 했다고 묘사되었죠. 역사와는 당연히 다른 설정인데다 주인공의 고난을 강조하기 것라지만 너무하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포로와 노예가 흔했다지만 한 나라의 영웅이 노예살이까지 했다는 건 화려한 볼거리를 위한 과장된 설정이란 점엔 변함이 없습니다.

노예들의 검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무신'의 격구.

특히 '광개토태왕' 담덕(이태곤)이 노예로 사는 동안 여석개(방형주)와 개싸움을 벌이는 장면, 김수로(지성)나 계백(이서진)이 상반신이 다 드러나는 낡은 옷을 입고 전투하는 장면은 미드 '스파르타쿠스(2010)'를 인식한 것이 아니냐는 평까지 받았습니다. 이후엔 한층 더 발전하여 '추노(2010)'나 '야차(2010)'등은 아예 노비 신분의 인물이나 검투 노예들의 이야기를 묘사함으로서 한국의 '스파르타쿠스'란 이야기까지 한때 꺼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 연대기식 사극 만으로도 흥미롭게 TV를 시청자들이 20여년 만에 이런 '영화같은' 볼거리를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주말극 '무신(武神)'은 처음부터 아예 노예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입니다. 어떻게 보면 논란에 구애받지 않고 '신분에 맞는' 격렬한 삶을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허준'의 플롯에 정사를 결합하고 노예들의 격구 장면은 '스파르타쿠스'의 그것입니다. 사극의 필수코스가 추가된 만큼 흔한 '사극' 만으로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어려워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멋진 근육을 자랑하며 고생했던 귀족 출신 노예들에게 질릴 만큼 질렸으니 어떻게 보면 '분위기만 풍기는' 것 보다는 본격 '스파르타쿠스'를 찍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강력한 것을 원해왔던 추세대로라면 훨씬 잔인하고 끔찍해진 것쯤은 감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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