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구멍난 옷을 입은 우리 삶을 보여달라, '미생' 윤태호 작가 인터뷰를 보고

Shain 2014. 10. 30.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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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녁 일과 중 하나는 JTBC '뉴스룸'을 시청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대에 볼만한 프로그램이 '뉴스룸' 뿐이기도 하지만 손석희 앵커를 어릴 때부터 참 좋아했으니까요. 뉴스 보도 형식의 1부와 뉴스 분석 형식의 2부 진행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제법 재미있습니다. 특히 어제 출연한 '미생' 윤태호 작가와의 인터뷰는 짧고 간결했지만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작가 본인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인터뷰 내용은 우리 시대의 TV 컨텐츠가 누굴 주인공으로 삼아야 하며 어떤 주제를 고민해야하는지, 의미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더군요. 이미 100만부가 팔려나갔다는 만화 '미생' - 드라마 제작과 함께 최근 불고 있는 '미생' 열풍은 지금까지의 컨텐츠가 현실에 소홀했다는 걸 반증합니다.


'뉴스룸'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를 가진 '미생' 윤태호 작가. 우리 시대의 컨텐츠는 누굴 주인공으로 삼아야하는가.


윤태호 작가는 인터뷰에서 '미생'의 돌풍 비결을 '나와 근접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분석합니다. 실제로 '미생' 웹툰과 드라마 관련 기사에는 '내 이야기같다'며 공감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먹한 기분에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취업준비하느냐 속태우고 동료 인턴들과 경쟁하느냐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자란 스펙과 막막한 미래에 어깨가 축 늘어진 젊은이들이 '미생'이란 컨텐츠를 보며 울고 웃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윤태호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이 섬세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요.


일부 사람들은 만화를 '우스운 컨텐츠'로 생각하지만 만화 자체도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취재와 시나리오, 콘티 작업이 필요하고 대사 하나하나를 뽑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는 제작된 컨텐츠 가치에 비해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종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TV 중심시대가 되고 나선 힘겹게 제작한 컨텐츠를 모티브만 쏙 빼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도 성공하는 사람은 일부입니다. '미생'의 성공과 함께 묵은 빚을 갚았다는 윤작가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둑도 그리 잘 두는 편이 아니고 실제 직장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윤태호 작가가 사람들을 울리는 대사를 탄생시킨 비결은 직장인들을 꼼꼼하게 취재한 덕분이었습니다. '먼지 같은 일은 먼지가 됐다'는 대사는 취재 과정에서 들었던 말이라니 놀랍기만 합니다. 웹툰에서 고졸에 스펙도 없는 장그래는 계약직으로 일하다 회사를 퇴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비정규직의 설움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비결 뒤에는 직장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어린 시선이 한몫했던 것입니다. 소외받는 만화작가로 살아온 윤작가의 삶과도 뿌리깊게 관련이 있었겠죠.









'버틴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 '미생'의 대사와 작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직접 '갑'이 아닌 '을'로 살아본 적 있는 윤태호 작가는 '미생'에서 '을' 중에서도 가장 처지가 안 좋은 장그래를 탄생시켰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국민들은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을'이라면 우리가 즐기는 컨텐츠 역시 '을'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할텐데 윤태호 작가의 인터뷰 내용대로 국민들은 '미생'같은 류의 드라마를 쉽게 접할 수 없습니다.


'미생'이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에서 제작이 되어야했던 속사정도 알고 보니 공중파 드라마 특유의 러브라인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나라 공중파 드라마는 이미 멜로 아니면 아예 제작이 불가능할 정도고 주인공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재벌 2세와 천재들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전국민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 회장님, 본부장님, 검사님이 멜로 드라마에선 어쩌면 그리 흔한지요. 한마디로 TV 속 컨텐츠도 '을'을 위한 것이 아닌 '갑'들의 세상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TV에서 조차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서민 드라마를 자처하고 있는 공중파 드라마들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공중파 드라마의 서민 기준은 작은 상가 하나를 소유하거나 대가족이 살 수 있는, 제법 넓은 서울내 주택을 소유한 가족입니다. 서민을 자처하면서 명품 브랜드 옷을 입는 건 예사입니다. 최근 JTBC에서 방송되는 '유나의 거리'가 입소문을 타는 이유 중 하나는 사실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등장인물의 묘사 때문입니다. 벌금낼 돈 백만원이 없어 몸으로 떼우고 독거노인이 혼자 죽어 발견되기 싫다며 우울해하는 장면은 우리 세대가 고민하는 바로 그 모습이니까요(물론 PPL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외면한 진짜 이 시대 '을'의 모습은 얼마나 고단하고 허름한가. '유나의 거리' 구멍난 속옷을 입은 장노인.


'유나의 거리'에 등장하는 장노인(정종준)은 전직 조폭으로 돈 한푼없이 후배에게 얹혀사는 신세입니다. 아무도 건사해 주지 않아 살림살이도 단촐한 장노인은 밖으로 나갈 땐 깔끔하게 차려입지만 집안에서는 구겨진 티셔츠 차림이고 자고 일어날 땐 여기저기 때가 타고 구멍이 뚫린 속옷을 입고 있습니다. 세트장 사정으로 입원할 때 마다 2인실에 들어가지만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인실에 자리가 없어서라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이게 바로 진짜 서민들의 현실이지요. 구멍뚫린 속옷 만큼이나 하루하루가 불안한 삶 말입니다.


'미생'이란 컨텐츠가 불러일으킨 열풍은 우리가 공중파에서 보고 있는, 화려한 가짜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우리가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현실을 외면해왔는지 절절이 느끼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은 고단한 현실과는 다르게 드라마 속 캐릭터가 말도 안되게 성공하는 모습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지만 가끔은 내가 사는 삶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위안도 필요합니다. 많은 공중파 드라마들이 '막장'내지는 '가짜 서민 드라마'라고 비난받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것일까요?


화려한 '갑'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공중파 드라마와는 다르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현실 속의 우리들은 '카트'를 밀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미생'의 장그래처럼 계약해지를 당합니다. 당장 방송사에서 그 현실을 고발하고 어떻게 바꿔달라는게 아닙니다. 최소한 진짜  사람들의 모습을 TV 속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인터뷰에서 윤태호 작가는 '만화가가 되는 재능은 어려운 환경을 버티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미생'을 위하여 - 진짜 서민들의 고민을 담은 컨텐츠야 말로 어려운 환경을 버티기 위한 '힐링'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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