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가스에 중독되어 괴로워하지만 한 남자는 태연하게 그 모습을 그냥 쳐다보고 있다. 잠깐 동안 비친 그 화면은 얼핏 지나갔지만 그는 아마도 얼굴에 이무에 표정이 없으었리라.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남자. 이거 새로운 종류의 사이코패스가 탄생한 것 같다. 표정이 덤덤한 건 그럴 수 있다 싶은데 저렇게 감정선이 균일한 배우는 찾기 힘들다. 첫등장에는 방독면으로 화면이 가려져 알 수 없었고 두 번째는 얼핏 스쳐가는 안경 낀 모습이라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이 배우 심상치 않다. 어떻게 감정선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한참 생각했다. 거기다가 이 드라마의 장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나는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 시청을 시작했다). 예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종교적 색깔이 무척 강한데 그렇다기엔 그들의 신(?)은 수상쩍고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이 남자 주인공은 조경호(엄태구)는 종종 이상한 힘을 이용하는데 그 힘의 정체는 최면인지 혹은 또다른 힘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대체 그 음침한 음악은 어떻게 그들이 힘을 이용하게 하는 것일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엑스 표시의 조합도 신기하다.
짐작으로는 그 힘이라는 아마도 사람을 조종하는 환상 혹은 최면으로 아주 작은 단서 만으로도 그들은 감옥 안에 갇혀 사람과 까마귀나 움직일 수 있다. 일부러 감옥에 갇혔다고 했지만 그 상태로 그냥 살아도 그리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를 다 보거나 듣지 않았어도 그는 금방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듯하다. 담뱃불, 라이터 모든 게 그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거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할 드라마를 선택한 느낌이다. 너무 음울하고 너무 단서가 많다.
그들은 무엇에 홀려있는 것일까
드라마의 자주 이동한다. 그 미스터리한 사람들은 대체 누굴 찾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고의로 시신을 비롯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장례까지 치렀지만 그들을 본 사람도 무엇을 하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아무래도 서로 다른 대상을 찾고 있는 기분이 든다. 세 팀이 나눠 서로 탐문하는 느낌이다. 한 팀은 경찰이고 두 번째 팀은 임인관(최광일)을 중심으로 한 팀이고 세 번째는 정영섭(이해운), 정민재(김정)를 중심으로 한 팀이다. 그들은 아무래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얽혀있는 듯하고 그들 주변에 있는 임인관(최광일)을 중심으로 권력을 가진 듯하다.
그중에서 가장. '나쁜' 무리는 임인관(최광일)과 관련된 사람들인 것 같고 좋은 사람인 척 말하지만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임인관(최광일)과 주변 인물들의 과거는 영 떳떳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건을 모두 잊거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가족 복지원 시절에 엄청난 사고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한가족 복지원에서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말하던 그 남자는 말하던 남자는 직접 나쁜 짓을 저지른 당사자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최형인(유재명)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었고 그때부터(아마도 1985년) 중요한 걸 잊었다.
최형인은 기억을 상실한 이후에도 이상한 일은 일어난다. 의문의 뺑소니 사고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이후 고향을 떠나 살게된 최형인은 그 4년 뒤에 가스 테러 사건을 겪은 것이다. 최형인이 완전히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떠나 있던 시간 때문인지도 몰라도 그날 이후 최형인은 남 들는 눈에 보이는 환각을 볼 수 없게 된 듯하다. 기억을 잊었기 때문에 봐야 할 무언가를 볼 수 없기 때문인지(그의 눈가를 오락가락하던 벌레도 환각일 수 있으니) 아니면 기억 상실 이전에 무언가를 잊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임인관 그리고 두 개의 세력
임인관(최광일)이란 등장인물른 극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극중에서 아직 살아있는지 어떤지는 불명확하지만 한참 후에 이후 태어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1999년에 종말론이란 게 유행하긴 했다. 어느 시점에선 휴거, Y2K 같은 말들도 유행했고 시대의 광기가 집어삼키긴 했지만 그 시대에 유난히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분위기를 틈타 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우울해했다. 임인관은 그 어디쯤 태어난 인물이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실한 무언가에 기대길 원했다. 그중의 하나는 '신'이라 불리는 존재였고 그중 하나는 '구루'라고 이름붙인 존재였다. '구루'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스승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확실하게 시대 구분은 안되지만 태극기같은 소품을 봐도 재떨이를 봐도 시대적 배경이 90년대 이전임은 분명하다. 20여 년 전에 유행한 세기말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고 20여 년이 전 세기말이라니 새 시대를 준비한다는 그 표현이 어떤 의미로도 신기하다. 그들은 아마 새 시대를 맞아 무언가 엄청난 사건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임인관은 과거에 나쁜 일을 하려 했었다고 했고 그 일이 무엇인지 밝힌 적이 없다. 임인관이 개과천선을 했다기엔 그는 여전히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조경호(엄태구)는 도대체 왜 가스 테러를 저지른 것일까. 최면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무얼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조경호는 최면을 걸어 모든 기억을 봉인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망치고 있네 자기가 뭘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라고 표현한다. 어떤 일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다는 말이다. 임인관은 선의와 악의 중 어느 쪽의 본성을 보여줄 것인가. 아마도 돼지와 사슴 그리고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스터리
아직도 그들의 미스터리는 끝이 아니다. 시간 순서상 최형인(유재명)과 임인관(최광일)의 미스터리가 먼저 풀려야하고 그다음은 임세윤(김새벽)과 나머지 사람들의 사건이 그다음이다. 물론 조정현(한혜리)의 그 사이에 기억을 지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 또 어떻게 보면 매우 큰 사건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은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도 조경호(엄태구)의 입양 같은 사건도 수상하고 생판 남으로 구성된 그들 가족의 친밀감까지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대체 그 세명의 아이들은 어떻게 입양된 걸까.
초반에는 엄태구의 등장과 화제상으로 인기가 유지되는 듯 했으나 너무 복잡한 떡밥에 질린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무엇보다 이 공포스러운 화면을 참고 시청하는데도 불쾌함이 계속되는 건 질릴 수밖에 없는 상황.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사람들이 그 비오는 장면을 참고 보기 힘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과연 87년 10월 6일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그런 표현을 썼을까. 87년은 분명히 과거의 일이다(참고로 이 일은 과거의 원한 때문이라고 한다 - 역시 두 팀은 매우 다른 목적을 가진 것 같다).
아역 배우들을 맞춰 세팅했는지 배우들이 많이 닮아 있었다. 특히 외까풀에 신경 써서 만든 거 같던데 배우들이 무척 고생했을 것 같다. 드라마 제작을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음이 분명한데 노력에 비해 티가 나지 않는 편이다. 거기다 테이프를 거꾸로 듣는다는 발상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 시절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만들었겠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과거를 잘 안다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돨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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