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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숨막히는 위기와 한발한발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어제 방영된 '빛과 그림자'는 그동안 방송되었던 그 어떤 에피소드 보다도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인공 강기태(안재욱)가 위기를 밟고 일어서 최고의 쇼비즈니스업자로 성공하는 이야기에 이제 간신히 적응했다 싶었는데 다시 또 아슬아슬 가슴졸이게 되다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 위험한 70년대에 조직폭력배 혐의로 수감되고 탈옥하고 보안사와 특전사에게 쫓길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드라마 곳곳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70년대 풍경은 보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기록을 상기시켜 줍니다. 1970년 12월, 경향신문에는 '유행병처럼 번진 인질극'이란 컬럼이 실렸습니다. 70년 한해에만 6건의 인질극이 있었고 70년대 내내 해마다 두세건 이상의 인질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무장탈영병 속출했습니다. 군경 합동으로 탈영병을 잡기 위해 불심검문을 실시하고 M16과 실탄을 소지한 탈영병들이 대치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그들이 탈영한 이유는 대부분 힘든 군생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탈영병이 검거되고 군으로 인계되면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는데(사형을 언도받는 경우도 많지만) 강하게 저항하다 사살당하기도 하고 탈영할 때 가져간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극중 장철환(전광렬)이 강기태를 잡기 위해 무장탈영병 핑계를 댄 것도 강기태가 시간을 벌기 위해 인질이 있다고 둘러댄 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설정이었던 셈입니다. 예전 '야망의 전설(1998)'에서 그랬듯 최완규 작가는 이번에도 극중 캐릭터를 실존인물, 그리고 시대상을 적절히 버무려 창조해냈습니다. 다만 '야망의 전설'의 정태(최수종)처럼 기태가 고생하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장철환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강기태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강기태와 조태수(김뢰하)를 살려 장철환의 권력 남용을 밝히고 싶어하는 중정 김부장(김병기)도 있습니다. 이미 그의 수하들은 신정구(성지루)에게 접근해 강기태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하에게 충성경쟁하는 두 이인자의 갈등으로 강기태는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탈옥이 최선의 방법이 된 셈입니다. 강기태가 다시 빛나라 기획으로 돌아온다면 대마초 파동으로 모든 가수들의 발이 묶인 지금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요.
가끔 유채영(손담비)의 모델이 가수 나미가 아니냐고 검색하는 분들이 있는데 노래와 댄스가수라는 점은 나미와 유사하지만 자발적으로 궁정동을 가고, 박과장(김재규와 함께 처형된 박선호를 말하는 거겠죠)에게 연락하려 미세스윤(엄수정)에게 부탁하고, 또 경찰에 잡혀 '누굴 불러달라'는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신인 이정혜(남상미)가 옷이 예쁘다고 하자 냉큼 가지라 건내주는 에피소드. 무대 욕심이 강해 고집을 부렸다는 면모 등은 당시 유명했던 김모씨와 훨씬 유사합니다. 그녀는 70년대에 이미자 등과 함께 일본에서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강기태가 다시 연예계 사업을 시작한다면 다음 무대는 일본이 되지 않을까요.
60년대에 가수 이미자는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연을 하고 또 일본어로 '동백아가씨'같은 노래도 취입했는데 이미자의 목소리는 많은 일본인들을 사로잡습니다. 허나 일본에서 활동하며 예명을 '리요시꼬'로 했다는 소문이 들려와 계속 이름을 그렇게 쓰면 외무부는 강제로 이미자를 소환하겠다는 강경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한일국교정상화'로 반일감정이 고조된 시기였고 '왜색' 시비가 자주 있던 가수다 보니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된 이유도 이 왜색 논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패티김 등의 가수도 일본에서 음반을 내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이후 70, 80년대에도 많은 가수들이 일본 공연을 가졌고 일부 가수들은 아예 일본에서 앨범을 내며 정착하기도 했지만 '조용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끈 가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왕 조용필은 일본 뿐 아닌 중국,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말 그대로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가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국내 최다 연말 가수왕상(11회 연속수상)을 수상하는 등 그가 세운 기록을 쉽게 깰 수 있는 가수가 없지만 해외에서도 그가 세운 기록도 경이적입니다. 1983년엔 국내가수 최초로 일본 NHK홀에서 공연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외국가수 최초로 100만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합니다(추억의 미아).
아직도 많은 팬들이 'チョーヨンピル(조용필)'의 공연을 기억하고 있다
조용필 1983년 NHK홀 공연
또 1987년 보아, 소녀시대, 카라 등이 출연해 화제가 되곤 했던 'NHK 홍백가합전'에 외국인 가수로는 최초 출연하기도 합니다. 1988년에는 공산국가였던 중국 북경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1987년, 조용필이 이미 결혼했음에도 일본 탤렌트 아오시마 미유끼는 고의로 조용필과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조용필의 깜짝 놀란 얼굴이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한국은 당시 연예인의 사생활이 언론에 오르내리면 가수활동을 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일본은 스타들과 스캔들이 계속 나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열풍'은 한국 내에서 또다른 '스캔들'을 퍼트리게 합니다. 87년 4월, 일본 여가수 하야미는 우리나라 쇼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합니다. 조용필이 70분 동안 스페셜 공연을 하는 날이었는데 친구로서 우정 출연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노래와 조용필의 히트곡인 '친구여'를 한국어로 부른 하야미는 일본 연예계에서도 스캔들을 엮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꾸준히 화제가 되었던 가수입니다. 한국 방문 동안에도 일본 매스컴이 따라붙었다고 하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조용필의 일본 인기가 가져온 해프닝입니다.
강기태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최봉호는 故 이주일의 평생 매니저를 자처한 사람이지만 조용필과도 친했습니다. 조용필 역시 이주일과 막역한 사이였음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곡들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어 일본에서 러브콜을 받곤 했던 조용필은 '필기획'이란 업체를 통해 일본 활동을 하다 이후 1983년 최봉호의 삼호 프로덕션으로 소속사를 바꾸게 됩니다. 70년대부터 이미 여러 가수들이 일본으로 넘어가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도 그 분위기는 이어졌습니다.
극중 유성준(김용건)이 순양댁(김미경)에게 자신이 땅부자라고 고백하고 80년대까지 꾸준히 문제가 된 정치검사 안도성(공정환)까지 등장한 것을 보니 분명 부동산 투기, 정치 부패 등까지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아무튼 강기태가 다시 성공해서 복수의 칼을 갈게 될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달이었다가 이후에는 복수를 꿈꾸는 열혈 청년으로 지금은 인생의 온갖 쓴 맛을 다 보고 있는 불안한 탈옥수로. 회를 거듭할수록 배우 안재욱의 연기는 물이 오르는 듯합니다. 이정혜와 통화하던 슬픈 눈빛이 참 마음아프더군요. 다음주에는 강기태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릴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드라마 곳곳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70년대 풍경은 보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기록을 상기시켜 줍니다. 1970년 12월, 경향신문에는 '유행병처럼 번진 인질극'이란 컬럼이 실렸습니다. 70년 한해에만 6건의 인질극이 있었고 70년대 내내 해마다 두세건 이상의 인질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무장탈영병 속출했습니다. 군경 합동으로 탈영병을 잡기 위해 불심검문을 실시하고 M16과 실탄을 소지한 탈영병들이 대치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그들이 탈영한 이유는 대부분 힘든 군생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차수혁을 협박해 장철환, 조명국을 유인해낸 강기태.
탈영병이 검거되고 군으로 인계되면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는데(사형을 언도받는 경우도 많지만) 강하게 저항하다 사살당하기도 하고 탈영할 때 가져간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극중 장철환(전광렬)이 강기태를 잡기 위해 무장탈영병 핑계를 댄 것도 강기태가 시간을 벌기 위해 인질이 있다고 둘러댄 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설정이었던 셈입니다. 예전 '야망의 전설(1998)'에서 그랬듯 최완규 작가는 이번에도 극중 캐릭터를 실존인물, 그리고 시대상을 적절히 버무려 창조해냈습니다. 다만 '야망의 전설'의 정태(최수종)처럼 기태가 고생하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장철환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강기태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강기태와 조태수(김뢰하)를 살려 장철환의 권력 남용을 밝히고 싶어하는 중정 김부장(김병기)도 있습니다. 이미 그의 수하들은 신정구(성지루)에게 접근해 강기태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하에게 충성경쟁하는 두 이인자의 갈등으로 강기태는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탈옥이 최선의 방법이 된 셈입니다. 강기태가 다시 빛나라 기획으로 돌아온다면 대마초 파동으로 모든 가수들의 발이 묶인 지금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요.
강기태가 빠져나갈수록 악에 바치는 장철환. 강기태를 확보하려는 김부장.
가끔 유채영(손담비)의 모델이 가수 나미가 아니냐고 검색하는 분들이 있는데 노래와 댄스가수라는 점은 나미와 유사하지만 자발적으로 궁정동을 가고, 박과장(김재규와 함께 처형된 박선호를 말하는 거겠죠)에게 연락하려 미세스윤(엄수정)에게 부탁하고, 또 경찰에 잡혀 '누굴 불러달라'는 거만한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신인 이정혜(남상미)가 옷이 예쁘다고 하자 냉큼 가지라 건내주는 에피소드. 무대 욕심이 강해 고집을 부렸다는 면모 등은 당시 유명했던 김모씨와 훨씬 유사합니다. 그녀는 70년대에 이미자 등과 함께 일본에서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강기태가 다시 연예계 사업을 시작한다면 다음 무대는 일본이 되지 않을까요.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원조 한류 조용필
60년대에 가수 이미자는 일본에서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연을 하고 또 일본어로 '동백아가씨'같은 노래도 취입했는데 이미자의 목소리는 많은 일본인들을 사로잡습니다. 허나 일본에서 활동하며 예명을 '리요시꼬'로 했다는 소문이 들려와 계속 이름을 그렇게 쓰면 외무부는 강제로 이미자를 소환하겠다는 강경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한일국교정상화'로 반일감정이 고조된 시기였고 '왜색' 시비가 자주 있던 가수다 보니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된 이유도 이 왜색 논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패티김 등의 가수도 일본에서 음반을 내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이후 70, 80년대에도 많은 가수들이 일본 공연을 가졌고 일부 가수들은 아예 일본에서 앨범을 내며 정착하기도 했지만 '조용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끈 가수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왕 조용필은 일본 뿐 아닌 중국,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말 그대로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가수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국내 최다 연말 가수왕상(11회 연속수상)을 수상하는 등 그가 세운 기록을 쉽게 깰 수 있는 가수가 없지만 해외에서도 그가 세운 기록도 경이적입니다. 1983년엔 국내가수 최초로 일본 NHK홀에서 공연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외국가수 최초로 100만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합니다(추억의 미아).
아직도 많은 팬들이 'チョーヨンピル(조용필)'의 공연을 기억하고 있다
조용필 1983년 NHK홀 공연
또 1987년 보아, 소녀시대, 카라 등이 출연해 화제가 되곤 했던 'NHK 홍백가합전'에 외국인 가수로는 최초 출연하기도 합니다. 1988년에는 공산국가였던 중국 북경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1987년, 조용필이 이미 결혼했음에도 일본 탤렌트 아오시마 미유끼는 고의로 조용필과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조용필의 깜짝 놀란 얼굴이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한국은 당시 연예인의 사생활이 언론에 오르내리면 가수활동을 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일본은 스타들과 스캔들이 계속 나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열풍'은 한국 내에서 또다른 '스캔들'을 퍼트리게 합니다. 87년 4월, 일본 여가수 하야미는 우리나라 쇼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합니다. 조용필이 70분 동안 스페셜 공연을 하는 날이었는데 친구로서 우정 출연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노래와 조용필의 히트곡인 '친구여'를 한국어로 부른 하야미는 일본 연예계에서도 스캔들을 엮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꾸준히 화제가 되었던 가수입니다. 한국 방문 동안에도 일본 매스컴이 따라붙었다고 하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조용필의 일본 인기가 가져온 해프닝입니다.
1987. 4. 4.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함까 출연한 하야미유와 조용필. MC는 이덕화, 송옥숙.
대마초 단속 이후 많은 가수들이 출연금지 당하고 그들의 노래 조차 금지곡이 되었지만 79년부터는 슬슬 그들이 활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故 이남이'같은 가수는 단속 이후에도 미8군 무대에서 계속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쇼단이 중심이었던 60년대에 비하면 70년대는 TV의 시대였기에 미8군 무대가 사양길이었지만 미8군은 대마초와 관계가 없어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극중 강기태의 새로운 기회가 '미8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셈입니다. 반면 8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화제가 되었던 일본 진출이 도약의 발판이 될 가능성도 높죠.강기태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최봉호는 故 이주일의 평생 매니저를 자처한 사람이지만 조용필과도 친했습니다. 조용필 역시 이주일과 막역한 사이였음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곡들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어 일본에서 러브콜을 받곤 했던 조용필은 '필기획'이란 업체를 통해 일본 활동을 하다 이후 1983년 최봉호의 삼호 프로덕션으로 소속사를 바꾸게 됩니다. 70년대부터 이미 여러 가수들이 일본으로 넘어가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도 그 분위기는 이어졌습니다.
유채영과 이정자의 다음 활동 무대는 일본이 될까?
이정혜의 친부가 정말 조총련계 파친코(빠찡코) 업체의 거물이라면 이 역시 큰 돈벌이가 될 수 있습니다. 강기태의 모델 역시 한때 같은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중정 김부장이 아무리 강력한 힘으로 강기태를 구명해준다고 한들 탈옥의 죄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강기태에게 시련이 닥칠 것만은 분명합니다. 재기의 장소가 일본이 될지 한국이 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고 또 시기가 80년대로 넘어가면서 10. 26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정치 권력 관계가 극중 '한빛회' 즉 하나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뜻입니다.극중 유성준(김용건)이 순양댁(김미경)에게 자신이 땅부자라고 고백하고 80년대까지 꾸준히 문제가 된 정치검사 안도성(공정환)까지 등장한 것을 보니 분명 부동산 투기, 정치 부패 등까지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아무튼 강기태가 다시 성공해서 복수의 칼을 갈게 될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건달이었다가 이후에는 복수를 꿈꾸는 열혈 청년으로 지금은 인생의 온갖 쓴 맛을 다 보고 있는 불안한 탈옥수로. 회를 거듭할수록 배우 안재욱의 연기는 물이 오르는 듯합니다. 이정혜와 통화하던 슬픈 눈빛이 참 마음아프더군요. 다음주에는 강기태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릴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가슴아픈 정혜와 강기태의 전화통화.
* 유성준과 순양댁이 만난 보리수 다방의 음악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75년 발표된 곡입니다. 당시 유명했던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길옥균이 작사, 작곡했습니다. 혜은이는 당시 신인으로 데뷰했지만 아버지가 '낙랑악극단' 단장이었습니다. 누구 보다 쇼단과 연예계 생활에 익숙했다는 뜻입니다. 가수로도 유명했지만 드라마, 영화 등에도 출연해 인기를 끌며 다양한 재능을 뽐내던 연예인이 바로 혜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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