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마의

'마의' 외전, 역사로 보는 현종과 숙휘공주 이야기

Shain 2012. 11. 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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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속 왕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백성들이 그 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일부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도루묵과 선조에 얽힌 야사인데요. '도루묵'의 원래 이름은 '묵'으로 겨울에 맛있는 생선입니다. 임진왜란으로 몽진갔던 선조가 고기 하나 없는 빈약한 밥상을 받다가 의주에서 한 어부가 이거라도 드시라며 '묵'을 올렸다고 합니다. 배도 고프고 반찬도 변변치 않으니 너무나 맛있게 그 생선을 먹어치운 선조는 그 맛을 칭찬하며 '묵'을 '은어'라 부르게 했는데 나중에 궁으로 돌아가 다시 먹어보니 맛이 없다며 '도로 묵'이라고 부르라 명했다고 합니다.

민간에 많이 퍼진 이야기지만 선조가 몽진간 의주에선 도루묵이 잡히지 않아(동해에서 납니다) 그냥 꾸민 말인줄 알았는데 조선 중기 택당 이식의 '택당집'에 환목어(還目魚) 즉 도루묵과 선조에 대한 시가 실려 있습니다.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어가는 그 때는 '은어(銀魚)'라 부르고 환궁하고는 '도로 묵'이라 부르라 했다는 선조의 반찬투정이 얄밉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 중 하필 도루묵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는 건 그만큼 선조가 인심을 잃은 왕이란 뜻도 됩니다. 수많은 야사를 들어보면 정치는 모르는 백성이라도 왕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는게 놀랍습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평범한 왕 현종? 멜로면에서 드라마틱하진 않다.


드라마 '마의'의 왕 현종(극중 한상진)은 놀랍게도 이런 야사가 거의 전하지 않는 평범한 왕입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며 또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왕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후궁이 없습니다. 경종이나 단종같이 병약하거나 즉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 또 추존왕들을 제외하면 후궁이 없는 왕은 현종 뿐입니다. 후궁을 여럿 두지 않다 보니 떠들썩한 스캔들도 별로 없고 별다른 잘못도 없다 보니 각종 사극에서 현종은 자주 제외되곤 합니다.

효종의 죽음으로 1차 예송논쟁이 또 인선왕후(극중 김혜선)의 죽음으로 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 현종 시기에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건 정치적으로 주목할만한 일이나 드라마 제작자들이 보기에 드라마틱한 시기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드라마로 만든 MBC '조선왕조오백년(1983)' 역시 효종과 현종의 시기는 건너 뜁니다. 인조 시기의 병자호란을 다룬 '남한산성(1986)'에서 바로 숙종 시기를 다룬 '인현왕후(1988)'로 넘어갑니다. 현종 시대는 멜로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 나라에선 드라마 컨텐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볼모로 끌려갔던 효종 부부는 청나라에서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후궁이 없던 이유는 예송논쟁의 주축이었던 서인 집안의 아내 명성왕후(극중 이가현)가 워낙 드세 그렇다는 말도 있고(장희빈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맞선 것으로 보아 일리 있습니다) '경신 대기근'을 비롯한 흉작이 계속되던 시대 분위기가 현종의 죄책감을 자극해 후궁을 둘 수 없게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의 5분의 1인 100만명의 백성이 굶어죽은 그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1670년과 1671년 사이의 일로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습니다. 오죽하면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노인들이 전쟁 때도 이보다 나았다고 했을 정도랍니다.

현종 시기의 경신 대기근과 숙종 시기의 을병 대기근은 소빙하기 현상에 의한 일종의 자연재해로 왕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었으나 백성들이 수없이 굶어죽자 젊은 왕 현종은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신하들은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를 두고 피터지게 싸우는데 백성들은 구제할 길이 없고현종은 그런 상황에서 후궁을 둘 수가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 워낙 몸도 많이 아팠는데 재위 초부터 눈과 습창, 종기 때문에 치료받았단 기록이 끊이지 않습니다. 서른 넷의 젊은 나이로 죽어간 현종은 왕들의 고질병인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고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숙휘공주 역시 서은서처럼 과부의 처지였다.


숙휘공주(극중 김소은)는 지난 포스팅에서도 한번 언급했듯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효종과 인선왕후의 넷째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효종 4년 즉 1653년에 정제현에게 시집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1살에 시집간 공주는 20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 부부 그리고 시아버지의 동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떴습니다. 본래 정제현은 우상 정유성의 손자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이어지자 곡절이 있다고 생각해 집주변을 파헤쳐 흉물을 캐내고 정유성의 관기 출신 첩 설매와 나인, 여종들을 국문했지만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효종이 살아있었다면 넷째딸 시댁에 줄줄이 초상이 나는 일로 꽤나 애태웠을 것입니다. '마의'에서 인선왕후를 치료하던 어의가 손이 떨려 이명환(손창민)이 대신 시침하던 장면을 보셨을텐데요. 숙휘공주의 아버지 효종은 종기를 치료받다 과다출혈로 죽었습니다. 그때 시술을 맡은 어의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벌 의지를 보이며 몹시 검소하게 살았던 효종과 넷째지만 큰딸이 일찍 죽어 실질적인 셋째딸인 숙휘공주 사이에는 재미있는 야사가 전해집니다(연려실기술). 효종은 숙휘공주가 수놓은 치마를 한벌만 해달라 졸랐더니 거절합니다.

역사 속 공주는 천민 백광현을 알아봐주는 그런 공주와는 거리가 있다.


당시엔 자수놓은 스란치마같은 화려한 사치품이 유행해 효종이 단속하고 신하들도 경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효종은 사위가 밥을 물에 말아 먹다 남기니 먹을 만큼만 말아야지 하면서 꾸짖었다고 합니다. 효종과 현종이 딸이자 여동생인 공주들에게 무척 신경쓴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효종은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놓은 치마를 입게 하겠느냐'며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효종은 내가 죽거든 입으라 했지만 공주는 과부가 되어 입으라고 해도 입을 수가 없었겠죠.

숙휘공주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한번에 잃고 2남 1녀의 자식들 중 아들 정태일을 제외한 모든 자식들이 죽고 그 정태일 마저 후손없이 죽는 불행을 겪는 공주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효종이 수치마 하나 쯤은 사줬으려나요. 어쨌든 정사와 야사 속에 등장한 현종은 흠잡을 곳도 없지만 강경하지도 않았던 왕이란 인상이 강하고 숙휘공주는 상당히 귀여움을 받았지만 사치한 공주였단 느낌이 강합니다. 천민 백광현(조승우)를 사랑하는 드라마 속 느낌과는 굉장히 많이 다릅니다. 숙휘공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홀로 살다 죽었다는 점이 정말 안쓰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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