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side/오락가락

우리 대통령 선거의 드라마틱한 반전을 꿈꾸며

Shain 2012. 12. 20. 13:04
728x90
반응형
SBS '드라마의 제왕'의 어린 앤서니 김(김명민)은 드라마를 보면서 답답한 자신의 현실을 잠시 잊곤 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앤서니김처럼 TV를 보며 자라났습니다. 저는 10대 시절에 인터넷은 꿈도 꿀 수 없는 산골에 살다 보니 TV나 잡지 말고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아예 없었습니다. 나이 들면 드라마 보다는 훨씬 좋은 오락거리가 생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훨씬 바빠져 여전히 TV가 가장 손쉬운 컨텐츠입니다. 책을 읽기엔 너무 피곤하고 영화나 뮤지컬, 연극, 콘서트를 보러 가기엔 시간과 거리 경제적 제약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TV를 편하게 생각할 것이라 봅니다. 저처럼 교통도 막혀 있는 지방에 산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지방에 잘 오지도 않는 특별한 뮤지컬 한편을 보러 한시간씩 차를 타고 달리고 밤늦게 공연이 끝나면 서둘러 거주지로 돌아와야하는 상황에 지칠 때 쯤이면 아 내가 서민이 감히 누릴 수 없는 호사를 꿈꿨구나 싶습니다. 이 작은 면에서 큰 도시로 나갈 수 있는 시외버스는 하루 단 두 대 뿐입니다. 처음부터 서울이 아닌 이 지방에서 '만만하게' 누릴 수 있는 문화는 TV 뿐이었던 것입니다.

육성회비를 못내 두들겨 맞아도 어머니 때문에 놀림 받아도 드라마를 보며 잠시 웃을 수 있던 앤서니김

물론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으니 가끔 미국 드라마를 보고 질리면 영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를 찾아보는 이 '문화생활'이 딱히 싫지는 않습니다. 또 한국 TV에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TV 드라마들이 잔뜩 있어 심심찮게 괜찮은 드라마도 건질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드라마' 속에서 지켜보는 삶과 시골의 환경은 같은 나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괴리감이 든다는 점이랄까요. 삶의 수준도 수준이지만 많은 환경의 차이가 이 나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합니다.

제가 사는 마을엔 노인들이 대다수입니다. 예전부터 전과자든 전직 조폭이든 1번당의 후보로 나왔다 하면 무조건 찍어주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몇몇 부유한 농가도 있지만 가난한 다문화 가족도 많고 조부모와 단촐하게 사는 어린아이들도 있고 기본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문해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면 소재지 안에 3층 이상의 건물이 단 한개도 없어 열한살이 되도록 엘리베이터 한번 타본 적 없다는 초등학생도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지만 떵떵거리며 살 만큼 큰 부자는 땅을 물려받은 일부 주민들 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태풍 때문에 비가림으로 비싸게 키운 포도 농사를 망쳤더니 재빨리 칠레산 포도를 수입하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품질좋은 한우를 키우지만 한우값 하락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농가 수익에 좋은 체리를 재배하라고 자료를 배포하더니 그해 미국산 체리가 싸다고 광고하는 멍청한 정부정책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꾸준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유기농법을 연구했고 그 유기농법으로 새 판로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민들은 변화에 더딘줄 알지만 생존이 걸린 일 앞에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실패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 뿐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영화관은 커녕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이 면소재지에서 TV 드라마를 봅니다. 실제 농촌의 현실이 아니라 도시인들의 귀농 판타지를 그리는 농촌 드라마를 보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어르신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 난무하는 드라마에 채널을 돌리기도 합니다. 현란한 화면에 시선을 주다가도 눈이 따가워 또 채널을 돌립니다. 같은 나라의 삶이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 그 사람들도 TV를 보면서 한번쯤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책적 소외 만큼이나 서글픈 것이 문화적 소외라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건 도시 사람들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들도 드라마가 판타지라는 건 알지만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드라마를 가득 채운 재벌의 러브 스토리나 보는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복잡한 출생의 비밀은 서민들과 동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였습니다. 화려한 PPL과 시청률을 노린 막장 설정 때문에 TV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는 어느새 서민이 아닌 재벌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데 공중파 방송들은 시청률을 핑계로 막장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MBC 일일극은 만들었다 하면 막장 논란에 휩싸입니다. 막장 드라마로 시청자의 정신을 쏙 빼어놓으라는 '지령'이라도 받았는지 아니면 편파 시비에 휘말려 시청률이 떨어지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2012년 한해 내내 질낮은 드라마를 양산하는 MBC는 시청자들에게도 인심을 잃었습니다.

서민 모두가 드라마 '대물'의 여주인공 서혜림처럼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꽃보다남자'의 주인공 금잔디처럼 재벌 남자친구를 두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그런 거창한 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나라의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수준을 보장받고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만족감을 갖고 살고 싶은데 한때 우리의 꿈이었고 제일 좋아하는 컨텐츠였던 TV 드라마는 이제 그 꿈을 위로해주지 못합니다. 드라마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것인지 현실이 끔찍해서 드라마가 현실을 외면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가 꼭 '정의'와 관련이 있으란 법도 없고 드라마틱하게 정권이 바뀌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서민들의 꿈인 드라마가 망가진 것처럼 정치 역시 망가져버렸다는 사실에 우리는 어느새 적응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항의하고 바꾸기 위해 발버둥치다가도 때로는 좌절해서 무기력해지고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고 싶은 이 현실. 그 현실을 한꺼번에 변화시킬 수 있는 드라마틱한 반전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국민은 수없이 실패했고 실망했지만 '민초'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밟히면서도 살아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울어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는게 풀입니다.

비현실적인 TV 드라마를 보면서 현실을 달래는 많은 사람들처럼 믿기지 않는 정치적 현실을 보면서 허탈해하는 국민들은 언젠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할 것입니다. 드라마 '추적자'의 억울한 아버지 백홍석이 모든 걸 이겨낸 그 장면처럼. 우리가 투표할 수 있는 그 권리가 언젠가는 극적인 반전의 밑천이 될 것이라 믿어봅니다.

여전히 정치인들은 투표하는 국민들을 가장 두려워하니까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