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마의

마의, 문화재 속에서 찾아본 숙휘공주의 흔적들

Shain 2013. 1. 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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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KBS에서 특종 보도한 뉴스 중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재벌이 소유한 문화재터에 지하층 공사 허가가 났다는 내용입니다. 창의궁터로 추정되는 통의동 35번지는 조금만 파내려가도 문화재가 쏟아지는 곳이라 웬만해선 지하층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곳입니다. 건축허가가 나기 이전 문화재로 추정되는 여러 유물이 발굴되어 같은 시기에 발굴된 다른 장소는 지하층 허가가 나지 않았는데 유독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소유한 이 땅에는 지하층 허가가 났습니다. 이 장소에는 '아름지기'라는 단체의 건물이 들어설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문화재인 이 '궁궐터'를 어떻게 중앙일보에서 매입했는지도 석연치 않았지만(청와대 쪽과 땅을 맞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재 지역에 신축건물을 올리는 '아름지기'는 뭐하는 단체냐 하는 문제도 큰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비영리단체인 '아름지기'는 전통문화 보존과 현대적 계승을 취지로 삼은 단체로 참여회원이 공개되어 있지 않으나 실질적으론 삼성가 여성들의 단체라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가 발굴되는 땅을 파헤친다는 점에선 논란거리가 될만한 행정처분이었습니다.

'진짜 숙휘공주'가 살았던 곳은 창의궁터인 통의동 35번지(출처 : KBS 뉴스)


드라마 '마의'에 등장하는 숙휘공주(김소은)는 지난주 방영분에서 실연을 당했습니다. 백광현(조승우)과 강지녕(이요원)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임을 기억해내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그 모습을 보게된 숙휘공주는 곽상궁(안여진)에게 매달려 서럽게 울었습니다.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말괄량이 천방지축 숙휘공주는 그렇듯 사랑스럽고 마음아픈 사랑을 합니다만 진짜 숙휘공주는 저 '창의궁터'에서 남편 정제현과 함께 살았습니다. 효종이 숙휘공주를 위해 크고 화사한 집을 지으려하자 숙휘공주의 시할아버지인 정유성의 청으로 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휘공주의 조카인 숙종은 아들 연잉군이 장성했을 때 이 숙휘공주의 집을 연잉군에게 사저로 주었고 숙빈 최씨도 이 집에서 죽었습니다. 이 집은 연잉군이 영조에 등극한 후 '창의궁'으로 불리게 됩니다. 연잉군은 이 창의궁터에서 아들과 두 딸을 낳았고 후에 우리가 잘 아는 영조가 되었습니다. 창의궁은 1908년 폐궁되기전까지 효장세자를 비롯한 왕손의 사당이 모셔지는가 하면  영조의 친필 현판도 있었습니다. 공주들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죽어 열녀문을 하사받았다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집도 창의궁 주변이라 창의궁터 근방은 추사 김정희의 생가로도 유명합니다.

12세에 시집갔던 숙휘공주의 '팔자'는 불운하다 못해 박복했다.


극중의 숙휘공주는 실연을 하긴 했어도 여전히 귀여운 공주이고 행복한 소녀지만 실제는 남편잃은 과부로 등장하는 서은서(조보아)와 더 비슷했습니다. 정성조(김창완)는 명문가의 딸인 며느리 서은서를 대놓고 구박은 못해도 왜 내 아들 따라 죽지 않느냐는 식의 눈치를 주는 시아버지입니다. 명색의 왕의 딸이자 왕의 누이인 숙휘공주는 1653년 인평위 정제현에게 시집가 2남 1녀를 낳았습니다. 일찍 결혼해 처음 결혼하고 7년 동안은 행복했던 것같지만 남편이 죽고 난 후의 인생은 시댁의 눈치만 보는 박복한 과부 팔자였습니다.

당시 우의정이던 연일정씨 정유성의 손자였던 정제현은 사람이 착하고 장인 효종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할 만큼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현종 3년에 덜컥 죽어버린 정제현과 숙휘공주의 합장묘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숙휘공주는 남편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가족들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시아버지 부부와 시아버지의 동생이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죽었고 시할아버지인 정유성의 첩이 집에 흉물을 묻어놓았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인선왕후의 요청으로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여종 하나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정제현과 숙휘공주의 합장묘는 고양시에 있다(이미지 출처 : 두산 doopedia)


거기다 2남 1녀중 정태일을 제외한 자식들도 모두 일찍 죽고 그 정태일 조차 25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없이 사망하고 맙니다. 시집 온지 10년도 안되서 가족들이 죽고 친정인 왕가의 위세로 집안을 쑥대밭을 만든데다 여종까지 죽게 한 과부가 후사도 잇지 못했으니 마음 고생이 말이 아니었겠지요. 평소 효종, 현종(극중 한상진), 숙종을 비롯한 왕들 뿐만 아니라 숙휘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극중 김혜선)와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극중 이가현), 그리고 숙종의 아내였던 인현왕후가 숙휘공주의 처지를 걱정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후손들은 그 편지를 묶어 '신한첩'을 만들었습니다.

불같은 성격이라 알려진 숙종의 정갈한 한글글씨도 흥미롭고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의 날카로운 글씨도 눈에 띕니다. 그런가하면 아기자기하고 단정한 인선왕후나 인현왕후의 편지도 재미있습니다. 왕가의 사람들이라 남의 눈 때문에 자주 오라가라 할 수도 없고 서로 걱정이 되어 편지만 주고 받던 그들의 심정이 드러나는 글로 시집가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숙휘공주의 처지를 꽤 많은 사람들이 염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딸의 처지 때문에 정유성 집안의 사건을 적극 조사하게 했던 인선왕후는 사위와 딸의 건강을 염려하며 꽤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왕실 가족들은 숙휘공주에게 꽤 많은 편지를 썼고 그 편지들 중 일부가 전한다.


우리가 즐겁게 보고 있는 드라마 속 숙휘공주는 일종의 판타지로 현실 속에서 살다간 한 팔자 사나운 과부 공주와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오죽 드라마 속 숙휘공주가 귀여우면 정제현에게 시집갔다는 역사를 왜곡하고 싶단 말까지 나올까요. 그러나 실존했던 숙휘공주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정말 역사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물질적으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공주였으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던 시집살이, 잠깐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하긴 그 시절에 왕가에서 태어났다고 특별히 더 행복하란 법은 없겠지요.

고주만(이순재)의 죽음으로 백광현에겐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쳤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행여나 백광현이 강상죄로 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걱정되어 적극적으로 백광현을 위해 나설 수 없는 숙휘공주의 속이 타들어가겠지만 백광현의 의학적 성장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고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인 것도 같습니다. 백광현과 숙휘공주는 실제로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드라마가 끝나고서라도 그들의 흔적이 남은 문화재를 보며 역사와 판타지가 어떻게 달랐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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