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side/오락가락

영웅이 되지 못한 크리스토퍼 도너의 드라마

Shain 2013. 2. 1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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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포스팅을 하기전에 '연속살인'이란 행위는 납받을 수 없는 범죄임은 전제로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회와 법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한들 한 개인의 자력구제를 용납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총기류를 이용해 사건과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살해한 행위는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입니다. 2013년 남부 캘리포니아 총격 사건의 범인 크리스토퍼 도너(Christopher Dorner)는 LAPD에서 근무하던 전직경찰관으로 지난 2월 3일 전직 LAPD 캡틴 랜달 콴의 딸, 모니카 콴과 그녀의 약혼자를 보복 살해했습니다.

이후에도 경찰과 경찰가족을 상대로 보복 범행을 저질렀고 이어 12일에는 순찰중이던 경찰 2명을 살해했으며 여러 명의 경찰이 공격했습니다. LAPD는 총기를 소지한채 도주한 크리스토퍼 도너를 잡기 위해 꼼꼼한 검거 작전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신문 배달 트럭을 아무 경고없이 가격해 한 모녀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LAPD의 검거작전을 비웃는 듯 빅베어 지역에 숨어있던 도너는 14일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빅베어 산장에서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사망했고 LAPD가 그 시신을 도너로 확인하며 모든 사건이 종료되었습니다.

검거전 CCTV에 잡힌 크리스토퍼 도너와 그가 은신하고 있던 산장에서 발생한 화재.


1979년 6월 4일생인 크리스토퍼 도너는 미국 뉴욕주 출신으로 2001년 남부 유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정치학 전공). 이후 2002년 미군에 입대, 미해군 대위로 승진하여 이라크전에 참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개의 명사수 훈장과 사격기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LPAD에 들어간 것은 2005년으로 2006년 경찰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수습으로 근무하던 중 상관의 범인 검거 과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크리스토퍼 도너는 테레사 에반스 경사가 범인 검거 과정 중 정신분열증 증세가 있는 크리스토퍼 개틀러를 마구 폭행했다며 공권력 남용으로 고발합니다.

이 사건이 크리스토퍼 도너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피해자인 개틀러는 정신분열증 증세로 인해 그 증언이 채택되지 않는 금치산자입니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개틀러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증언했으나 LAPD는 이미 도너를 상관의 평점에 불만을 품고 거짓으로 고발한 혐의로 해고한 뒤였습니다. 상관을 무고한 죄로 판결했으니 해직은 당연한 조치였으나 자신의 눈으로 시민 폭행을 목격한 도너는 이에 반발하며 크게 분노합니다. 사람좋은 미소로 나라를 위해 일하던 군인이 하루 아침에 변해버린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를 자주 보시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LA 지역은 유난히 경찰이 폭력적이기로 유명합니다. LA는 인종차별로 거센 폭동을 겪었던 지역인데다 여러 인종 출신의 갱스터가 많아 종종 진압과정에서 무장한 범죄자와 총격전을 벌여야할 때도 있습니다. 갱단 때문에 단순 용의자 검거에도 꽤 많은 경찰병력이 투입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LAPD 하면 수십년전부터 부정부패의 상징이었습니다. LAPD의 부패상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었을 정도니 말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피해를 입었던 1992년 'LA 폭동'의 시작도 경찰관의 구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남부유타대학을 졸업하고 군인으로 복무하던 당시의 모습.


1991년 운전중이던 로드니 킹은 과속운전으로 도주하던 중 경찰관에게 잡혀 무차별 구타를 당합니다.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촬영해 TV로 방송되었으나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건에 분노한 LA 지역에서 인종차별을 이유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2008년 경찰에 해고된 후 인터넷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소하는 등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가 어떤 과정으로 경찰과의 전쟁을 감행하게 되었을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었던 크리스토퍼 도너의 감정이 격앙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과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도너에게 살해된 모니카 콴의 아버지 랜달 콴은 전직 LAPD 캡틴 출신 변호사로 도너의 상관이던 테레사 에반스 경사의 변호를 맡았던 인물입니다. 인터넷에 올려진 성명서에서 도너는 인종차별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따돌림을 받았던 경찰 생활이나 여전히 부정부패의 온상인 LAPD를 비난하며 경찰들에게 보복할 것이라 선언합니다. 헐리우드 드라마나 영화에서라면 한 경찰관의 무서운 분노가 멋지게 극화되었겠지만 기댈 곳 없는 해직 경찰관인 도너는 '람보'가 아닌 일개 시민일 뿐입니다.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은 결국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도너는 범행을 계획하기 전 CNN에 자신의 소송 자료를 비롯한 몇가지 증거(유투브 동영상)를 보냈고 이 일을 계기로 도너의 사건은 재조사될 것이라 합니다. 일각에서는 도너가 갑작스런 화재로 사망한 것이 모든 일을 덮고 싶은 LAPD의 무리한 진압 아니겠느냐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인질로 삼았던 산장 사람들의 증언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크리스토퍼 도너에 대한 동정론이 일고 있으며 한 영어교육과 교수는 그의 말이 '완전히 미친 소리는 아니다'며 잘못된 체제를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혹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로 유명한 지강헌 사건(1988)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호송버스에서 탈주한 지강헌은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은 600억을 횡령하고도 7년형을 받는데(그마저 특사로 2년만에 풀려납니다) 500만원을 훔친 자신에게는 17년형을 선고한 법체계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살인에는 동의할 수 없어도 때로는 사람들의 폭력성을 무한대로 끌어올릴 만큼 억울하고 부당한 사회체계가 있다는 점에는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이라는 동정론이 확산되는 것도 그때문이겠지요.

지강헌 사건이 '홀리데이(2005)'라는 영화로 꾸며진 것처럼 언젠가는 실존인물 크리스토퍼 도너도 영화나 드라마로 부활할 날이 오겠지요. 개인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영웅'이 많은 세상 보다는 자연스럽게 사회체계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으로 복무하다 경찰이 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사회체제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이 약간은 이해가 간다는게 참 씁쓸하네요. 내가 믿고 의지해야할 세계가 날 배신한다는 느낌이 공포스럽게 다가옵니다. 더불어 현실 속에서는 '람보'같은 영웅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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