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마의

이병훈 PD의 '자기 복제' 사극이 좋은 이유

Shain 2013. 3. 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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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왕인 '세종'에 대해서 궁금할 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서를 읽어보면 됩니다. 한자로 적혀 난해하고 사관들의 조심스러운 언어 사용 때문에 헷갈리기는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기록을 통해 세종대왕이 책과 학문을 좋아하고 일중독이었으며 실리적인 사람이란 걸 알게 됩니다. 의외로 인자하기 보다는 성격이 급하고 고기를 몹시 좋아했으며 본부인 소헌왕후와 금슬이 좋았으나 후궁도 꽤 많이 두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세종이 면천해준 것으로 유명한 장영실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해서는 찾기가 힘듭니다. 아무리 그의 삶이 궁금해도 역사적 접근에 한계가 선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왕족이 아닌, 한때 민중의 영웅이었던 인물들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부패한 양반들을 꾸짖었던 진짜 홍길동이 일본 대마도에 유구국을 세운 이야기라는 사람도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장길산이나 임꺽정같은 의적들이 어쩌다가 농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는지 후세대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역사는 어떻게 보면 가진자들과 권력자들의 전유물이고 평범한 백성들과 민중 영웅의 삶이 궁금하면 현대인들은 상상력을 동원해 추측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점에 포인트를 맞춰 창작된 드라마가 바로 '민중사극'입니다.

이병훈 PD의 대표 인기 사극 중 하나인 '암행어사(1981)'.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연출했다.


이병훈 PD의 퓨전사극은 많은 부분 그런 민중사극 컨셉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끈 '허준(1999)'이나 '대장금(2003)'은 모두 사서에 기록이 많지 않은 인물인 허준과 장금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해 창조해냈고 시청률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왕족이 주인공이 아닌 백성이 주인공이 되는 사극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한 평범한 인간이 왕 못지 않은 큰 성공을 거둔다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사극이 역사왜곡이나 사서의 한계에 묶인다면 절대로 이루어낼 수 없는 성공으로 이병훈 PD는 상상력과 역사를 결합시켜 최고의 궁합을 끌어냅니다.

이런 류 사극은 왕족이 아닌 민중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극이 과거 만을 언급한다는 관념을 파격적으로 깨기도 합니다. 드라마 '마의'에서도 극중 백광현(조승)이 '궁금하면 다섯푼,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같은 현대인들의 유행어를 대사로 옮긴 것처럼 드라마 속의 민중들은 마치 현대인들처럼 역사 속 실존인물들을 대합니다. 어려워서 한자를 모르면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용어들을 현대어로 바꿔놓기도 하고 극중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현대인들과 유사하게 연출합니다. '마의'의 혜민서 의생 교육이나 수술 과정이 의과대학의 그것과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상상력이 역사와 결합하면 현대의 사건을 사극 속에서 풍자하기도 쉬워집니다. 이병훈 PD의 대표사극이자 민중사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 '암행어사(1981)'는 사극화된 수사반장이란 별명을 가진 드라마입니다. 극중 정의로운 암행어사의 실존 모델은 조선 후기 영조 시대의 박문수로 암행어사로 활약하며 부정한 관리를 적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드라마 '암행어사'는 박문수의 캐릭터와 흡사한 어사(이정길)와 그를 호위하며 각종 뒷조사를 담당하는 상도(안호해), 그리고 어사의 몸종이자 도우미인 갑봉(임현식)을 등장시킵니다.

왕이 아닌 백성을 주인공으로 대부분의 시도는 성공적이다. '동이(2010)', '허준(1999)', '대장금(2003)'


그들이 해결하는 사건은 현대의 사건을 조선시대로 옮긴 것으로 수절한 과부를 희롱하는 난봉꾼을 잡아넣거나 장물아비 일을 하는 패거리를 벌주고 의문의 살인사건이나 폭행, 협박 사건 등을 해결합니다. 대부분은 조선 시대의 사건을 극화한 것이라기 보다 그 시대에 자주 벌어지던 사건 사고를 드라마로 옮긴 것들이죠. 사극을 통해 현대를 풍자하는 이런 방식은 민중사극 특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드라마 '마의'가 신분제의 문제점이나 선입견의 위험함 그리고 대민의료정책이나 의료보험, 영리병원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서 속 역사를 재해석하는 정통사극과는 다른 맛이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사극도 '권선징악'적인 결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때로는 역사 속 기록과 달리 방향을 잡으면서도 동화같은 결말을 추구합니다. 사서에는 숙빈 최씨의 말년이 숙종에게 사랑받지도 못하고 궁밖에서 아들과 살다 외롭게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이(2010)'의 주인공 동이(한효주)는 궁밖에서도 자신의 꿈인 백성돕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발랄하게 뛰어다니며 때때로 잠행을 나오는 숙종(지진희)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때로는 '출생의 비밀'이나 '삼각관계'같은 통속극 코드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 선을 넘지 않는 부드러운 연출로 보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누구나 지적하듯이 이병훈 PD의 이런 연출방식이 전작의 구조와 전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기 복제'라는데 있습니다. 극중 인물의 관계를 바꿔버리다 보니 역사극이 아니라 왜곡극이라는 논란은 늘 따라다니고 주인공이 각종 퀘스트를 거쳐 성공하는 기승전결의 결말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이병훈 PD의 마지막 드라마라는 '마의'는 동물들을 드라마에 출연시키고 백광현이라는 전무후무한 한방외과의사를 드라마로 끌어들여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전개 방식에 있어서는 이병훈 PD의 기존 사극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병훈PD의 자기 복제 결정판이라는 '마의'는 동물과 한방외과의라는 신선한 소재를 드라마에 끌어들였다.


새로운 드라마에 목마른 시청자들로서는 이런 '고정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환영합니다. 제 기억에 이런식으로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한 드라마 연출자는 우리 나라에 몇되지 않습니다. 또 그만큼 오래 활약한 노장 제작자나 PD도 드문 형편이라 늘 똑같은 스타일이나 자기 복제 방식을 보여주는 연출자가 오히려 반갑다고 할까요. 특히 취향이 아니라서 보지 못하는 각종 홍콩 무협 드라마나 늘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 같은 느낌에 쉽게 지루해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기에 굳이 '자기 복제'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1956년에 방송된 HLKZ-TV의 '천국의 문'은 우리 나라 최초의 TV 드라마라고 합니다. TV 드라마 역사 60여년 동안 소위 '막장 드라마'라 불리는 통속극을 만든 사람들은 많지만 사극에서 이렇게 성공적인 포맷을 구축한 PD는 드뭅니다. 알고 보면 이병훈 PD는 우리 나라의 대표 정통사극 중 하나인 '조선왕조오백년(1983)' 시리즈의 연출자로 신봉승 작가와 함께 당시 완역되지도 않았던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사극을 제작한 사람입니다. '사극'이라면 알만큼 아는 사람이 굳이 퓨전사극, 민중사극을 선택했으니 우리 나라 대중들의 바람을 아주 잘 읽어낸 것이라 봅니다. 특히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우리 나라의 사극 제작자로 유명했던 '용의 눈물(1996)' 故 김재형 PD가 왕실 중심 정통사극의 한 축이라면 이병훈 PD는 민중 중심 퓨전사극의 한 축으로 현대의 많은 사극들이 그의 창작 방식을 많이 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일상과 고통, 염원을 담지 못한 채 또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사회 비판도 담지 못한 채 퓨전이란 이름 만으로 사극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기 복제 보다 못합니다. 어제 종영된 '마의'가 진짜 이병훈 PD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는 두고볼 일이나 그동안 여러 드라마 덕분에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잘 보았다는 말 한마디쯤은 꼭 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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