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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에 이병훈 PD가 찍은 드라마 중 '출생의 비밀'을 설정한 사극이 거의 없습니다. 백제 무왕의 이야기를 다룬 '서동요(2005)'에서 부여장 서동(조현재)이 자신이 백제의 왕자라는 걸 모른채 평민으로 살지만 진짜 무왕이 그렇게 살았으니 출생의 비밀(이하 출비)이라기는 힘듭니다. 이병훈 PD의 작품이 아닌 '선덕여왕(2009)'같은 사극에서 중국에서 자란 덕만(이요원)이 자신이 신라의 공주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는 걸로 설정되었으나 그 역시 덕만의 어린 시절이 '역사적 공백'이라 가능했고 선덕여왕의 폭넓은 경험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에서 출비는 자칫 왜곡 논란에 시달릴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대장금'이나 '광개토대왕'처럼 출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적은 인물들은 창작에 의존해 드라마를 꾸밀 수 밖에 없지만 기록이 명백한 실존인물에게 출생의 비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극이 드라마의 한 범주이고 다큐멘터리 보다 극적 재미를 우선한다고 해도 부모까지 바꿔야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창작된 내용을 실제 기록 보다 강조하려면 대체 왜 그 인물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드라마 '마의'의 주인공 백광현(조승우)은 태어난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출신과 업적, 죽음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어의입니다. 현종 때 전의감 교수로 특채되었고 숙종 때 어의로 많은 공을 세웠으니 어릴 때 아이를 잃어버렸다 찾은게 아닌 이상 출비를 엮긴 힘든 인물입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찌된 일인지 백광현을 강도준(전노민)이란 양반의 핏줄로 설정했습니다. 무인 집안 출신의 의관 백광현의 본명이 '강광현'이라는 걸로도 모자라 그와 아기 때 바뀐 강지녕(이요원)이란 가상인물도 끌어들였습니다. 두 사람의 얽힌 운명이 이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이기도 합니다.
신의라 불리던 백광현의 인생에서 한방외과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광현은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놀라운 시술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습니다. 꼭 다큐멘터리 타입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잘 몰랐던 의원 백광현의 과거와 인간승리 그리고 당시의 한방의학과, 시대상을 재조명하는 만으로도 드라마틱합니다. 외과술의 불모지였던 조선에서 감히 왕족을 상대로 칼을 들었던 백광현은 기적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당연히 '마의'의 많은 부분은 백광현의 의학적 업적에 할애되어 있고 우리들이 잘 몰랐던 임언국의 '치종지남'까지 선보였습니다.
반면 나머지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역사와 전혀 관련없는 창작된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백광현의 의학적 에피소드 보다도 창작된 인물들의 출비나 악역을 맡은 이명환(손창민)의 운명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의'도 드라마인 이상 지루한 의학 관련 연출 보다는 드라마틱한 가상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기도 합니다. 거기에다 실존인물의 드라마를 장편으로 엮을 땐 그 인물 관련 기록 보다 제작자나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담는 편이니 실제 역사 보다 창작된 이야기가 돋보이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현종(한상진)이나 인선왕후(김혜선), 주인옥(최수린)같은 인물들은 백광현이 맞서야하는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의료정책을 펴고 싶어도 대기근이나 당파싸움 때문에 뜻을 펴치 못하는 왕과 외과술과 신분에 대한 편견을 가진 왕실 여성, 마찬가지로 의술 보다는 미신적인 믿음이나 탕약을 선호하는 일반백성들은 백광현이 헤쳐나가야했던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의원의 길을 걷는 강지녕이나 이명환, 최형욱(윤진호)같은 인물은 의원 백광현의 보조적인 아바타같은 존재들입니다. 천재적인 의원이었던 백광현이 처음부터 완벽한 의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의 출신 이명환은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혀 김자점(문태원), 이형익(조덕현), 정성조(김창완)같은 권력자들에게 협력합니다. 나중에는 그들 보다 훨씬 악한 사람으로 거듭나 인선왕후와 숙휘공주(김소은)의 병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최형욱은 소중한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슬픔에 사람을 살리기 보다는 기술에 집착하는 사이코가 되었습니다. 강지녕은 백광현에게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르쳐준 정신적인 동료로 운명적인 짝인 동시에 백광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이 보조적으로 그려지는 것 처음부터 이 드라마의 메인은 '의원 백광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회에 가까워질수록 의원 백광현 보다는 출생의 비밀이 강조되고 강지녕의 캐릭터가 부각되면서 인선왕후의 발제창 치료까지 묻히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운명을 직접 선택하는 지녕, 그리고 광현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건 알겠는데 지녕의 폭로 덕분에 조선왕실의 유교적 가치관은 완전히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온 궁궐이 발칵 뒤집힐 출생의 비밀을 터트렸으니 드라마 속 현종과 인선왕후는 백광현의 본명이 강광현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를 영원히 '백광현'으로 살게한 셈이 되버렸습니다. 핏줄을 중요시하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왕과 대비가 출생의 비밀을 덮어준 것입니다.
극중 효숙왕대비(인선왕후)는 대범하고 용감했던 실존인물에 비해 지나치게 고집스런 캐릭터입니다. 출세에 눈이 먼 천한 마의가 어떻게 감히 자신을 치료하나며 노발대발합니다. 왜 그렇게 이상한 캐릭터를 만들었나 생각해왔는데 어제 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왕족 앞에서 스스로 출비를 폭로하는 강지녕을 위한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효종의 명으로 신원되었으니 인선왕후는 지녕에게 효종 만큼이나 은혜로운 사람이고 친정의 특별한 인연으로 더욱 지녕을 총애했던 인선왕후입니다. 출비 폭로는 관비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에서 제일 무서운 죄인 '강상죄'까지 엮을 수 있는 무서운 선택입니다.
창작된 인물들과 실존인물들이 어우러져 '의술'과 '의원'과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잘 버무린 훌륭한 대작이 탄생하길 기대했는데 통속극 최강의 카드인 '출생의 비밀'은 사극에서는 역시나 극약인가 봅니다. 어차피 설정된 거라면 최소한 왕족 앞에서 터트리는 일만은 피하길 기대했는데 사서에 기록된 실존인물들을 바보로 만들면서까지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캐릭터는 살아났는지 몰라도 사극의 시대성은 망가지게 된 셈입니다.
사극의 묘미는 역사 속 기록을 잘 살리면서도 드라마틱한 재미를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한 캐릭터의 비중이 살아나고 줄어드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실존인물의 삶을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시대상을 무시하면서까지 폭로된 출생의 비밀 따위는 현대극(특히 막장드라마)에 넘겨주고 사극 만이라도 앞으로는 이런 설정을 자제했으면 합니다.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에서 출비는 자칫 왜곡 논란에 시달릴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대장금'이나 '광개토대왕'처럼 출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적은 인물들은 창작에 의존해 드라마를 꾸밀 수 밖에 없지만 기록이 명백한 실존인물에게 출생의 비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무리 사극이 드라마의 한 범주이고 다큐멘터리 보다 극적 재미를 우선한다고 해도 부모까지 바꿔야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창작된 내용을 실제 기록 보다 강조하려면 대체 왜 그 인물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드디어 드러난 '출생의 비밀'. 강지녕은 관비가 될 각오로 인선왕후 앞에서 비밀을 털어놓는다.
신의라 불리던 백광현의 인생에서 한방외과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광현은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놀라운 시술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습니다. 꼭 다큐멘터리 타입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잘 몰랐던 의원 백광현의 과거와 인간승리 그리고 당시의 한방의학과, 시대상을 재조명하는 만으로도 드라마틱합니다. 외과술의 불모지였던 조선에서 감히 왕족을 상대로 칼을 들었던 백광현은 기적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당연히 '마의'의 많은 부분은 백광현의 의학적 업적에 할애되어 있고 우리들이 잘 몰랐던 임언국의 '치종지남'까지 선보였습니다.
실존인물 백광현은 그의 임상 기록 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현종(한상진)이나 인선왕후(김혜선), 주인옥(최수린)같은 인물들은 백광현이 맞서야하는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의료정책을 펴고 싶어도 대기근이나 당파싸움 때문에 뜻을 펴치 못하는 왕과 외과술과 신분에 대한 편견을 가진 왕실 여성, 마찬가지로 의술 보다는 미신적인 믿음이나 탕약을 선호하는 일반백성들은 백광현이 헤쳐나가야했던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의원의 길을 걷는 강지녕이나 이명환, 최형욱(윤진호)같은 인물은 의원 백광현의 보조적인 아바타같은 존재들입니다. 천재적인 의원이었던 백광현이 처음부터 완벽한 의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백광현의 의학적 성장과 시대상을 조명하기 위한 수많은 등장인물들.
그러나 마지막회에 가까워질수록 의원 백광현 보다는 출생의 비밀이 강조되고 강지녕의 캐릭터가 부각되면서 인선왕후의 발제창 치료까지 묻히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운명을 직접 선택하는 지녕, 그리고 광현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건 알겠는데 지녕의 폭로 덕분에 조선왕실의 유교적 가치관은 완전히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온 궁궐이 발칵 뒤집힐 출생의 비밀을 터트렸으니 드라마 속 현종과 인선왕후는 백광현의 본명이 강광현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를 영원히 '백광현'으로 살게한 셈이 되버렸습니다. 핏줄을 중요시하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왕과 대비가 출생의 비밀을 덮어준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과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희생된 실존인물들과 시대상.
창작된 인물들과 실존인물들이 어우러져 '의술'과 '의원'과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잘 버무린 훌륭한 대작이 탄생하길 기대했는데 통속극 최강의 카드인 '출생의 비밀'은 사극에서는 역시나 극약인가 봅니다. 어차피 설정된 거라면 최소한 왕족 앞에서 터트리는 일만은 피하길 기대했는데 사서에 기록된 실존인물들을 바보로 만들면서까지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캐릭터는 살아났는지 몰라도 사극의 시대성은 망가지게 된 셈입니다.
'마의'로 인해 평가가 엇갈린 두 실존인물 인선왕후와 명성왕후. 인선왕후는 '출비'로 인해 가장 손해본 인물.
* 참고 : 드라마 '마의'의 의학 자문으로 활약하시는 방성혜 한의사님이 인선왕후의 발제창에 대해서 자세한 글을 올려두셨더군요(http://blog.daum.net/shbang98/151). 천(川)자형으로12센티나 절개해야했던 인선왕후의 병을 임파선 암이 아닐까 추정한다는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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