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유산, 국수 가업은 과연 백억의 가치가 있을까

옛날에도 재산과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혼사를 결정하는 일이 많았지만 최소한 드러내놓고 돈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집안이 양반이냐 아니냐를 따지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라 경우밝은 부모님 밑에서 예의를 배우며 자랐다던가 가진 것 없어도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성실하다는 인성을 높이 쳐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좋은 집안'과 결혼한다는 말의 의미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거나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 보다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은 되도록 물려주고 물려받고 싶은 정신적 유산입니다. '백년의 유산'에서 이혼녀 민채원(유진)을 반대하던 세윤(이정진)의 아버지 이동규(남명렬)가 채원이 예전부터 알고지낸 국수집 손녀란 말에 호감이 생긴 것처럼 '집안'을 따진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됨됨이를 본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췌장암에 걸린 엄팽달(신구)이 자식들을 속이면서까지 물려주고 싶어했던 국수 만드는 가업이 과연 자식들의 직업을 포기시킬 만큼 가치있는 것인가는 개인 마다 판단이 달라질 것입니다.

물려줄 백억 유산이 없다는 말에 자식들은 허탈해하고 며느리들은 까무라친다.

꼭 국수공장이 아니라도 예전부터 지켜온 것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부모가 있는가하면 생계에도 사회적 지위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 전통을 버리고 싶어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물려받아야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가업이라도 배곯고 고생하면서까지 물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에 인생을 걸고 시간을 투자하는 일을 꺼려할 수 밖에 없는게 현대사회입니다. 비단 가업 뿐 아니라 종손이 받들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나 제례가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사는 아무리 간소하게 지내도 돈이 많이 듭니다. 하다 못해 종손이라서 종산에 대한 권리를 차지할 수 있다거나 땅을 빌려주고 제사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일년에 열두번도 넘게 지내야하는 제사 비용은 생각 보다 많습니다. 때로는 큰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니 제사에 대한 예의가 어려워 꺼리는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기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즘 집안 마다 제사를 물려받고 싶지 않다는 자식과 물려줘야겠다는 부모 간의 갈등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백억이냐 가업이냐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가업을 선뜻 선택할 수 있을까.

국수공장의 엄팽달은 백년이나 이어온 가업을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물려주려 거짓말을 한 것도 있지만 그가 국수사업을 포기해야한다는 것 보다 서글펐던 것은 자식들이 정신적 유산의 가치를 하찮게 생각한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백억 보다 더 귀한 사람됨 즉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먹을 것을 아낄 줄 알고 음식에 담긴 사람에 대한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정신적 가치가 백억 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해왔기에 백억 유산을 물려준다고 자식들에게 거짓말을 한 엄팽달입니다.

죽음을 앞둔 엄팽달은 자식들이 무언가를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거짓말을 했지만 엄팽달의 건강상태를 잘 모르는 자식들은 물려받을 백억이 없다는 말에 패닉상태가 됩니다. 그동안 백억을 차지하기 위해 밀가루를 고르고 국수를 말리고 음식을 만들면서 느꼈던 기분을 자식들은 금새 잊어버립니다. 엄팽달 할아버지는 포도밭에 보물을 묻어놓았다는 이솝우화의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자식들이 포도밭을 부지런히 일구기도 전에 비밀이 탄로나버렸습니다.

포도밭에 보물을 묻었다는 이솝우화같은 거짓말이 되길 바랐는데. 너무 쉽게 탄로난 백억의 비밀.

원래는 게을렀지만 아버지가 숨겼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고 부지런히 일한 아들들이 포도밭에 풍년이 들어 부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숨긴 보물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성실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이솝우화처럼 엄팽달 할아버지도 가업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엇임을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극중에는 사람 됨됨이 보다는 돈에 눈이 멀어 채원을 괴롭히는 여러 인간형이 등장합니다. 방영자(박원숙)나 백설주(차화연)는 채원이 돈없는 국수공장의 딸이란 이유로 무시합니다.

요즘 장년 세대는 전통의 단절을 뼈저리게 느끼는 세대입니다. 제사와 전통 때문에 고민하고 유산 상속 싸움을 벌이는 집안이 의외로 많다고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물려받고 지켜나가야하는 아랫세대의 입장에서는 너무 돈돈거리는 방영자도 정이 뚝 떨어지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서 백억유산이 있다는 말을 한 엄팽달도 거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국수공장을 크게 확장시키기 위해 국수경연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민채원의 꿈은 그런 의미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배넷저고리 끈을 보고 깜짝 놀란 백설주. 백설주 역시 돈과 관련된 모종의 비밀을 숨긴 것같다.

세윤의 엄마 백설주는 돈에 얽힌 또다른 거짓말을 숨긴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세윤은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해 주리(윤아정)에게 속아도 성실하고 착한 민채원의 가치를 알아볼 만큼 착한 남자입니다. 백설주가 같은 고아원 출신인 양춘희(전인화)를 극도로 경계하고 원장수녀가 보내준 배넷저고리 끈을 남몰래 꺼내보며 불안해하는 이유도 아마 돈과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들을 낳아야한다고 압박한 시어머니 때문에 재벌가에서 쫓겨나기 싫어서 엄청난 일을 저지렀다는 것이죠.

민채원이 엄팽달의 가업도 잇고 외삼촌과 이모의 경제적 위기까지 해결해줄 수 있는 멋진 가업잇기를 성공시키고 백설주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이야기겠지요. 엄팽달의 백억이 없었다는 말도 자식들을 테스트하기 위한 또다른 시험이 아니냐는 댓글도 보았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엄팽달의 상태를 모르는 자식들이니 지금은 돈 밖에 안보일 것이 봅니다. 돈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일겁니다. 백억의 돈과 정신적으로 백억 가치가 있는 가업 중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