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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유산, 김갑수 만큼 안타까운 신구 할아버지의 죽음 예감

Shain 2013. 5. 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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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갑수하면 명연기로도 유명하지만  '죽는 역할 전문 배우'로도 유명합니다. 김갑수가 출연했다 하면 팬들은 '이번에는 죽지 말라'고 격려를 하고 김갑수가 나왔으니 곧 죽을거라 지레짐작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오죽하면 배우 김갑수는 출연 자체가 스포일러라고 합니다. '아이리스2'는 '아이리스1(2009)'에서 죽었던 김갑수를 얼굴만 같은 다른 역할로 재등장시키나 했더니 이번에도 죽는 역을 시키더군요. 연기자 본인도 늘 죽는 역만 맡아 기분이 좋지 않을 거란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 기억에 김갑수씨만큼이나 자주 죽는 역할을 하는 배우가 이순재씨입니다. 1935년생인 이순재씨는 코믹한 역도 자주 맡지만 주로 고집쎈 재벌 노인역이거나 죽음으로 가족을 떠나는 역할을 맡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나 훌륭한 연기를 선보여 사극, 현대극 가리지 않고 출연합니다. 최근 종영된 '마의(2012)'에서도 드라마 초반부에 사망했고 '공주의 남자(2011)'나 '마이 프린세스(2011)'에서도 그랬습니다. 물론 드라마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긴 했습니다만 여든이 다 된 배우의 죽음 연기는 어딘지 모르게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어쩐지 마음이 짠해지는 엄팽달 할아버지 역의 신구. 췌장암 말기의 노인 역할이다.

김갑수씨에 비해서 죽는 역을 하는 횟수가 매우 적지만 연세가 연세인지라 과연 저 배우가 어떤 느낌으로 저 역할을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거죠. 연기의 본질은 원래 기억의 재현이라고들 합니다. 연기력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덜어지는 그런 재능은 아니지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직접 겪거나 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죽음을 앞둔 역할을 맡은 노인 배우들이 인상적인 이유는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막연한 두려움에 마음고생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 연기자에게 연기란 열정인 동시에 고통입니다. 연예인들에게 가장 잔인한 순간은 부모가 죽어도도 시청자들을 감동시켜야하는 순간이라던가요. '백년의 유산'에서 독한 시어머니 역을 하는 박원숙씨는 2003년 외아들을 트럭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인 2005년 '어여쁜 당신'에서 박원숙씨는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이 중환자실에 누워있자 오열하는 연기를 해야했습니다. 당시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실제로 울면서 촬영하는 박원숙씨 때문에 드라마와 현실이 구분가지 않더라고 인터뷰합니다.

모진 경험이 연기를 만든다. 가끔은 그 연기가 연기자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당시 기사로 난 내용을 살펴보면 아들이 죽었을 때도 '아들이 중환자실에 실려 들어갈 때 스태프가 나타나 이것은 드라마 촬영이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었다'라며 인터뷰하기도 했던 박원숙. 시청자들 중에는 트럭사고로 아들을 잃은 연기자에게 또 같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는 연기를 시키다니 당사자에게 너무 잔인한 일 아니냐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연기자 직업은 감성소모적인 직업이라 지나치게 우울한 연기나 험한 역할은 심한 스트레스를 준다고 합니다.

다행히 박원숙씨같은 경우 소리지르고 거친 역할을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편이고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는 합니다만 죽는 연기를 하는 나이든 배우들의 경우 살날이 살아온 날 보다 적다는 사실이 무거운 스트레스가 되지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백년의 유산'에서 고집세고 꾀많은 노인 엄팽달 역을 맡은 신구씨는 늘 굵은 목소리에 드센 역을 맡는 이순재씨에 비해 조용한 역할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극중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췌장암 말기 환자입니다.

아내의 타박에 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들어가버리는 엄팽달.

백년 가업인 국수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백억유산이 있다고 자식들을 속인 엄팽달 할아버지. 백억 때문에 생계를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온 자식들은 백억이 없다는 말에 모두 집을 나갑니다. 엄팽달 할아버지가 시한부라는 사실은 손녀 민채원(유진)과 양춘희(전인화), 그리고 이세윤(이정진) 만 알고 있습니다. 남편이 자식들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난 김끝순(정혜선) 여사는 엄팽달에게 치매 아니냐며 막말을 퍼붓습니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 가게 다 때려치운 자식들이 안타까워 하는 말입니다.

자식 인생 망치면서까지 가업을 이을 필요가 없다는 김끝순 여사는 남편이 죽을 병에 걸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고로 예부터 노인네 눈 히멀거니 풀리면 저승 문턱이 코앞'이라는 말이 기분좋을 때는 부부끼리 웃고 넘길 수 있는 말이고 평소같으면 화를 내고도 남음이 있는 말이지만 엄팽달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 슬퍼보여 양춘희가 보다 못해 김끝순 할머니에게 한마디합니다.

이렇게 타박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늙은 아내가 알기나 할런지. 연륜이 드러나는 연기.

이미 주변정리를 시작한 엄팽달 할아버지가 평소 잔소리많던 아내가 나한테 이럴 날도 얼마 안남았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입을 닫은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가려했는데 내가 벌써 죽음의 기운을 풍기고 있구나 싶어 가슴이 철컹 내려앉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심란한 마음에 풀이 죽어들어간 것인지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캐릭터 덕분에 쉽게 가늠할 수는 없더군요.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쁜 남편 속도 모르고 바가지 긁는 아내가 잠시 잠깐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사실을 알리면 울기 밖에 더하나 싶어 말 안했는데 그 속을 몰라주나 싶어 말입니다.

복잡한 '백년의 유산' 전체 이야기에 비하면 엄팽달 할아버지의 출연은 매우 짧았습니다. 슬프다는 짧은 말로도 표현안되는 세월의 무게, 그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은 어린 사람들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배우의 연륜 덕분일 것입니다. 한쪽으론 저것이 연기다 싶고 다른 한편으로 나이드신 배우들의 죽는 연기는 너무하다 싶기도 합니다. 정붙이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하구요. 뭐 이순재씨와 신구씨는 나영석 PD가 만드는 어르신 버전 '1박 2일'인 '황혼의 배낭여행'에 출연할 만큼 건강이 좋으시다고 합니다만 부디 무리하진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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