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방송된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만든 히스토리컬 픽션입니다. 이강토(주원)가 실존인물이 아니듯 극중 인물들 역시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그들 캐릭터에는 모두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이 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한 캐릭터가 채홍주(한채아)인데 채홍주는 아시다시피 실존인물 배정자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채홍주는 조선에서 아버지가 죽자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 권력자의 양녀가 되고 조선으로 되돌아와 스파이 노릇을 하며 일본의 충견이 되었다는 점이 배정자와 거의 흡사합니다.
'배정자'라는 인물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장 원망스러워할 존재이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이용당한 셈이지만) 뼈속까지 일본인이라는 생각으로 일제를 위해 충성한 배정자는 70 나이에도 직접 '정신대'를 조직해 전쟁터로 끌고갈 만큼 지독 했습니다. 민간업자와 결탁해 돈을 받고 여성들을 끌어들인 배정자의 악행 때문에 종종 일본 극우세력들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갔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상인물이라도 '각시탈'의 채홍주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죠. '라라'라는 이름으로 멋진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남자들을 매혹하기도 합니다. 목단(진세연)이 조선여성으로 존재감없는 역할을 하고 민폐 지적을 받을 동안 채홍주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배정자'를 생각하면 채홍주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나 미화는 지나친 것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채홍주는 가상캐릭터였고 각시탈을 사랑하는 등 실존인물과 전혀 달라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아버지의 죽음으로 기생이 된 배정자에게 일본 권력자의 양녀라는 선택은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배정자의 독하디 독한 친일 행적을 제외하면 어린 시절은 정말 불행했습니다. 명성황후의 외척인 민씨 정권에 의해 아버지가 죽고 노비가 되었고 기생으로 팔려갔다가 도망쳐서 승려가 되었던 어린 배정자는 채홍주 보다 훨씬 고달팠을 것입니다. 배정자가 자신을 고통스럽게한 조선을 원망하고 강자인 일본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으론 힘든 팔자 탓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같은 동포를 위안부로 보내고 독립투사를 잡기 위해 만주로 떠난 그녀는 피해자가 아닌 적극적인 가해자의 길을 선택 했습니다. 그때부터 배정자의 삶은 동정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스파이 교육을 받은 그녀의 삶은 드라마틱합니다. 서른살 연하와도 동거했던 화려한 남성편력과 대담한 스파이 활동까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 월급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그녀의 가족은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배정자의 삶이 아무리 불쌍해도 '친일파 역적'으로 취급받는 건 그녀가 가해자이기 때문이죠.
흥미로운 건 배정자의 후손들이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세운 사람들이란 점 입니다.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는 한국 근대무용 선구자로 추앙받으며 한국 최초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또 배구자는 최초의 연극전문 극장인 '동양극장'을 남편 홍순언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 내용은 드라마 '동양극장(2001)'으로 만들어진 적도 있죠. 아들 전유화는 의료인으로 유명했고 딸 현송자는 남편 이철과 오케(OK)레코드사를 설립했습니다. 이철은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으로 유명한데 스타시스템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탁월했던 인물입니다.
배정자와 기황후는 어떤 점이 다른가
최근 방영중인 '기황후'에 대한 반감을 포스팅하면 '악플'이 종종 달립니다. 재미있는 건 제 포스팅을 그쪽에서 '악플'이라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배우 쪽 팬클럽인지는 알바 아닙니다만 '자격' 운운하는 본인의 막말은 댓글이고 드라마에 나쁜 평가를 내린 포스팅은 '악플'이라는 관점이 참 재밌더군요(그래서 '기황후'인가 봅니다). 그중 몇몇은 팬 본인이 아니라 특정 배우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싶어 지워주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실존인물 기황후를 비교한 어떤 분의 댓글에는 누구 팬인지 배우가 참 안됐다 싶었습니다.
한편 기황후 관련 포털 뉴스가 올라오는 곳엔 분란이 일어납니다. 역사 왜곡이라는 반감 섞인 댓글이 올라오면 반박 댓글이 올라오고 때로는 욕설이 오가거나 웃기 힘든 심각한 내용도 올라옵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기황후를 공녀로 끌고간 고려가 잘못했으니 기황후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당연하지 않냐는 동정론부터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가 100%로 승자의 기록이니 기황후에 대한 기록도 조작되었다는 글, 기황후가 없었다면 고려도 없었다, 공민왕이 배신자라는 내용까지 말입니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겪은 배정자가 일본 스파이로 성공(?)한 것도 귀족 집안 출신의 공녀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것도 그녀들 개인에겐 인생역정입니다. 인간승리라면 인간승리고 능력이 남달랐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겠죠. 조국을 싫어하는 이유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그녀들의 삶과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되고 나중에는 '각시탈'의 채홍주처럼 묘사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배정자'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각시탈'의 채홍주처럼 묘사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기황후가 될 기승냥(하지원)이 남장을 하고 충혜왕(주민모)과 함께 여전사로 활약하는 모습은 '다모(2003)'의 정의로운 채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연기자가 연기자인 만큼 채홍주처럼 인기를 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 팬들은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역사 운운하지 말라며 판타지니까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제목을 가상의 인물도 아닌 실존인물 '기황후'로 선택한 이상 역사와 무관해질 수가 없습니다. 드라마의 특징은 모든 것을 주인공 중심으로 판단하게 하고 공감하게 한다는데 있죠. 드라마 속 주인공의 이름이 실존인물이 되면서 이미 미화는 시작된 것 입니다.
실존인물 기황후와 배정자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들의 나라가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는 것과 나라의 실정으로 외국에서 살아야했다는 점. 그리고 조국이 아닌 적국의 입장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는 점도 거의 똑같습니다. 그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황후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고 배정자는 그의 죄를 입증할 자료가 너무나 많다는 점 이죠. 이 때문에 일부 팬들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고려 입장에서 조작되었고 기황후가 나쁘게 기술되었으니 그 시대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식으로 뭉뚱그리기도 합니다.
조선왕실에서 1392년 편찬하기 시작한 고려국사는 다섯번 개찬되어 1451년에 완성됩니다. 객관적인 사서 편찬을 요구하는 세종대왕 덕분이었죠. 용어와 인물평가에 이런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왕조에 반대했다고 해서 역적으로 기록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려국사'를 개찬한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공식적인 사료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해당하는 정동행성으로 국정간섭을 했던 기씨 일족의 악행과 횡포, 기황후의 고려 수탈과 공격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각시탈'의 채홍주처럼 가상인물이면 모를까 우리 나라를 침략한 나라를 '대원제국'이라 부르는 것도 '대일제국'이란 말 만큼이나 거슬리는 판에 왕유(주진모)만 가상인물이지 타나실리(백진희)를 비롯한 나머지들까지 모두 그 시대 생존했던 실존인물들입니다. 예전에는 역사를 표현한게 사극이었다면 요즘은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는게 사극이란 말이 딱 맞나 봅니다. '기황후' 제작진의 논리라면 몇년 뒤에는 배정자를 옹호하는 드라마도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불쌍한 조선 여인의 드라마틱한 인생이니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시대극이나 사극을 '퓨전 사극'이란 정체불명의 용어로 핑계를 대는 경향이 강합니다만 영국같은 사극 강국은 '히스토리컬 픽션'이나 '히스토리컬 판타지'를 만들어도 역사속 인물은 신중하게 묘사합니다. 특정인물을 묘사하는 관점을 바꾸되 그 인물을 무조건 영웅화하지 않고 찌질하고 잔인한 악행까지 그대로 묘사합니다. 굳이 실존인물 기황후를 드라마 주인공이 선택하려면 방향을 바꾸던가 이름을 모두 바꾼 판타지 픽션을 선택했어야 합니다. 기황후 관련 기사 마다 올라오는 그릇된 옹호야말로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네요. 부디 '원피스'의 루피와 기황후를 비교하는, 배우 망신시키는 댓글이 다시 달리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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