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이가 지나면 자신이 잘못된 점을 알아도 고치기 힘들다고 합니다. 자신의 거친 말버릇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 성큼성큼 앞에서 혼자 걸어가는 습관이 옆지기를 외롭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바꾸기가 힘들죠. 행여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면 그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것을 힘들어하는 배우자를 위해 손이라도 잡아주고 천천히 같이 걸었으면 좋았을 걸 후회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와 헤어진 사람에겐 옆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아쉽고 함께 걸을 때 손잡을 사람이 그립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나하고 나눌 수는 없는 일이죠.
재민(이상엽)과 헤어진 미주(홍수현)는 하림(서지석)의 친근함에 거절 의사를 밝힙니다. 이년이나 사귄 재민과의 만남이 아픔이었기에 하림을 받아들이는게 그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같다고 말하죠. 하림 역시 어머니 때문에 강제로 헤어진 10년 전 연인이 아팠다며 그냥 친하게 지내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재민과 하경(신다은)은 직장에서 만나 점점 더 서로에 대한 호감을 쌓아갑니다. 어머니의 맞선 독촉을 피해보자고 재민에게 사귀는 척을 하자고 제안한 하경에 비해 재민 역시 가끔씩 미주 생각을 합니다.
나이든 사람에 비해 유연하다는 젊은 사람들 조차 만남을 이렇게 망설이는데 하물며 67세의 정현수(박근형)와 50대 중반의 홍순애(차화연)가 단박에 친해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직 판사 출신이라는 정현수는 꼬장꼬장하게 법전을 따지던 성격 탓에 자식들과도 원만하게 대화를 하지 못합니다. 큰딸 유진(유호정)이 속마음을 감추고 야무지게 가족들을 건사하는 모습이 안쓰러워도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고 유라(한고은)가 불륜을 저지르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밖에서 낳아온 막내 재민이 누나들 눈치를 보며 겉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출생의 비밀 때문에 방황하면서 마음아파한다는 것도 아는데 따뜻한 한마디를 건내기 보다 좀 더 잘 하라는 질타로 재민과 어긋나곤 합니다. 취직했다며 기뻐하는 재민을 보며 다른 부모들처럼 크게 기뻐하는 아니라 축하한다는 덤덤한 한마디로 재민을 섭섭하게 합니다. 취직 때문에 재민이 마음고생한 만큼 축하를 받고 또 받아도 실감이 나지 않을거라는 사위 성훈(김승수)의 말에 정현수는 애썼다는 말을 재민에게 해주지 못한 자신의 미흡함을 깨닫습니다.
드라마 '사랑해서 남주나'는 첫회부터 지금까지 정현수의 쓸쓸한 어깨를 계속 보여주었습니다.'You`re Only Lonely'라는 올드팝이 정현수의 외로운 뒷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유부남과 어울리는 딸의 불륜을 알면서도 누구한테 털어놓지 못한채 혼자 울고 연인과 헤어진 아들 재민의 고통을 보면서 따뜻한 위로를 건내지 못한 정현수는 붙임성없고 꼿꼿한 자신의 성격을 잘 압니다. 노래가사처럼 어깨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고 자신이 작고 외롭게 느껴질 때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런 정현수에겐 속터놓을 사람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그런 마음을 말하는 상대가 사위 성훈인데 싹싹한 성격 덕인지 정신과 의사 특유의 감각 덕인지 성훈은 장인에게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걸 간파합니다. 직접 맞선 업체에 연락하고 정현수의 선자리를 주선한 성훈 덕분에 홍순애와 가까워질 계기를 마련하게 되죠. 홍순애 역시 마찬가지로 미주 때문에 맞선 자리에 나온 길이었고 만나자 마자 혼인신고와 재산 문제를 이야기하는 상대방 맞선남에 기분이 상한 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정현수의 멱살을 잡으며 울분을 터트리던 폐지줍는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길 나누게 됩니다.
홍순애는 앓아누은 박스 할머니에게 줄 반찬을 싸들고 정현수와 함께 할머니를 찾아갑니다. 정현수는 할머니의 아들이 죽은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같지만 홍순애는 아픈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원없이 쏟아내라고 합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판사 시절의 일 때문에 찾아간 정현수도 대단하지만 할머니의 딱한 사연을 알고 챙기러 찾아온 홍순애의 마음도 따뜻합니다. 그러나 무거운 반찬과 솨고기 한근을 들고 할머니의 집까지 올라가는 일은 노년의 두 사람에게 힘겹기만 하죠.
오르막길에 익숙치 않은 정현수는 힘들고 지쳐서 가던 길을 멈추고 홍순애는 그런 정현수의 짐을 자신이 들겠다며 뺏어서 들고 갑니다. 정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순애에게 손수건을 건내고 순애는 이 나이에도 남자가 손수건 주니까 가슴이 뛴다며 우스개소리를 합니다. 혼자말에 익숙한 정현수는 그런 순애가 싫진 않은 듯 생각나는 말을 다 뱉어니니 속병은 없겠다고 하죠. 억울하게 죽은 자식 생각에 앓아누운 할머니를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두 사람의 동행은 계속 됩니다.
올라올 때는 정현수가 힘들어했지만 내려갈 때는 홍순애가 힘겨워합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던 홍순애는 무릎 때문에 내려가는게 더 힘든 거죠. 정현수는 그런 홍순애에게 잡고가라며 팔을 내줍니다. 순애는 잘못한게 없다고 변명도 못해서 억울한게 아니냐며 소주를 권하죠. 순애는 듣기만 하는 정현수에게 선생님처럼 꼬장꼬장한 성격은 세상살기 참 힘들겠다며 자식들 앞에서도 체면차리고 자존심 세우냐고 정곡을 찌르고 자식들도 힘들고 선생님도 외로울 거라는 말에 정현수는 헛기침만 합니다.
사랑한다며 아내를 보채는 성훈과는 달리 책임을 강조하는 유진처럼 죽을 때까지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게 결혼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가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것과는 다른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없는 노년이 되고 보면 뜨거운 사랑도 책임도 아닌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길을 걸어가는, 작은 일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그리워지는 법이죠. 자식들 앞에 유리벽을 느끼는 정현수가 그런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었다면 지금 보단 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는 둘의 동행을 보며 진짜 부부란 저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뜨거운 사랑도 단단한 책임감도 언젠가는 약해지지만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간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의지가 됩니다.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함께하는 모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따뜻하더군요. '사랑해서 남주나'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많은 관계가 등장합니다. 격한 젊은이들의 사랑 보다 혼자 집에 들어와 슬그머니 홍순애가 잡았던 팔을 만져보는 정현수의 마음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 마음이 꾸밈없는 사랑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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