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때로는 너무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사랑에 빠지는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어떻게 하면 한순간에 초인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모든걸 파괴적인 본능으로 바뀌어버리는지 납득할 수 없는 순간도 있습니다. 사랑지상주의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평범한 호감과 동떨어진 무엇으로 묘사하는 그 느낌도 그 격렬함도 공감가지 않을 때가 많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어떤 장르 보다 멜로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든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비밀'의 지독한 멜로에는 눈길을 뗄 수가 없습니다. 여주인공 강유정(황정음)이 울지 않은 날이 없고 때로는 누구 보다 도도한 신세연(이다희)까지 수시로 눈물을 쏟는 이 드라마의 최루성이 어쩐지 싫지 않습니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촘촘한 시나리오가 식상한 멜로 드라마도 완벽한 사랑이야기로 바꾸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15회에서 보여준 강유정과 민혁(지성)의 이별은 보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더군요 저렇게나 깊고 푸른 사랑이라니. 푸른색과 조화를 이룬 사랑이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는 유정의 대사와 세연과 결혼한 뒤 '재미없다'고 이야기하는 민혁의 대사는 결국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하는 진짜 메시지였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처럼 유정과 민혁에게는 사랑이 곧 삶입니다. 이 대사는 서지희(양진성)가 죽자 세연 앞에서 '재미없다'며 음독 자살을 시도한 민혁의 대사와 이어집니다. 민혁이 세연의 화실에 누워 '사는게 왜 이렇게 재미없냐'라는 말을 할 때 세연은 '땡땡이'쳤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K그룹 조민혁이 아닌 그냥 너는 매력없다'고 대구하죠.
세연과 민혁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결혼식을 강행합니다. 신혼여행도 취소하고 호텔에 들어온 세연에게 민혁이 묻습니다. '세연아 넌 재미있냐'라고 말입니다. 이미 삶이 곧 사랑이라는 걸 아는 민혁에게 목적을 위한 결혼이 재미있을 리 없습니다. 민혁에게 삶이란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 물같은 사랑이었습니다 . 버스에 올라타던 유정을 은행잎이 휘날리는 푸른 물속으로 끌어당기던 민혁과 짙푸른 하늘이 아름답던 침실에서 유정과의 사랑을 확인하던 민혁은 이미 짙푸른색에 물들어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첫회부터 지금까지 '비밀'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물'의 이미지를 자주 보여주었죠. '물'은 눈물인 동시에 나락을 의미합니다. '비밀'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물 속으로 빠져든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세연은 푸른 물을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을 두려워했고 그 그림에 동질감을 느낀 안도훈(배수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푸른 물 속에 빠져버린 유정과 민혁, 푸른 물을 바라보며 갖고 싶어 하는 세연과 도훈의 대립이 '비밀'에서 의미하는 사랑의 대립구조였습니다.
한편 '비밀'이 첫회부터 지금까지 신비로운 분위기와 시청자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흥미로운 흡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은밀하게 울리는 오르골 소리입니다. 잔잔하게 들리는 오르골 소리는 드라마 속에서 보여주지 않는 캐릭터들의 숨겨진 과거나 어린 시절을 암시 하고 있습니다. 첫회에서 톨게이트에서 민혁이 자신에게 던져준 비싼 반지를 끼고 꿈을 꾸듯 거울을 바라보던 장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드러나지 않은게 있다는 암시처럼 느껴지죠. 사랑이란 이름의 푸른 죄수복을 입기 전까진 유정도 흔하고 평범한 사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민혁에게 오르골 소리는 어린 시절을 의미합니다. 홍여사(조미령)의 말처럼 민혁은 '재미'없는 삶에 지친 어머니가 자신을 홍여사에게 맡기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어제 밝혀진대로라면 홍여사는 아들과 남편을 부탁한다는 말에 진심으로 민혁과 민주(송민경)를 사랑하는 '말도 안되는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민혁은 삶이 곧 사랑이었던 어머니의 인생을 부정하며 조회장(이덕화)과 홍여사의 불륜 때문에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민혁도 어머니처럼 삶이 곧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미없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세연과 도훈이 서로를 향해 느꼈던 호감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서로 같았기 때문이겠죠. 세연은 어린 시절 민혁과 땡땡이를 치러나갔다가 돈떨어지고 물집이 잡혔던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사랑받는 딸이기 보다 정치인인 아버지의 도구였던 세연에게 반항은 곧 고통을 의미했습니다. 도훈은 사랑하는 유정이 도훈의 검사 뒷바라지를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가난한 부모님이 속물스럽게 사는 모습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아픔 속으로 투신하기 보다는 그 아픔을 최대한 피하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이었습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고 말겠다는 세연의 삐뚤어진 욕망도 유정이 아닌 세연을 위해 범죄를 서슴치 않는 도훈의 악행도 다치기 싫은 마음의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역시 사랑을 갈망하지만 자신이 다치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푸른 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세연의 그림처럼 푸른 물을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이었던거죠.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울리던 오르골 소리는 어린 사랑에서 발전하지 못한, 성숙하지 않은 사랑을 의미 했습니다.
유정은 민혁과의 사랑으로 진실에 침묵했던 입을 열었습니다. 민혁은 한층 더 성장해서 아버지를 보살필 줄 알고 세상에는 홍여사처럼 '말도 안되는 사랑'이 있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말을 듣지 않던 세연과 진실을 외면하던 도훈도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사랑을 찾게 될지 두고볼 일이죠. 시청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도훈과 유정의 아이인 산이는 도훈엄마(양희경)가 숨겨두었고 유정이 진짜 뺑소니범이 도훈이고 유정의 아버지(강남길)를 길에 버린 사람도 도훈이란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하자 도훈엄마는 산이가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마지막회가 하루 밖에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자식의 존재를 알게된 도훈이 모든 걸 뉘우치고 자수를 할 지 세연이 스스로 민혁을 보내줄지 또 광민(이승준)을 사랑하는 듯한 민주의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 알 수없는 상황입니다. 보여준 복선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 결말을 맺어도 여운이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러나 지금까지 봤던 드라마 중에 '비밀' 만큼 사랑이라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드라마도 드물었던 걸 생각하면 사랑이 곧 삶이라는 메시지를 표현하기엔 충분하리란 생각이 드네요.
많은 시청자들이 '비밀'은 기업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이라는 평도 합니다. 서지희를 죽인 것으로 의심받는 신세연이나 여자친구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운 안도훈이 천벌을 받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확실한 건 '비밀'이 그동안 TV 드라마에서 진부하게 표현되던 '사랑'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그려낸 멜로 판타지가 될 것이란 점이고 한동안은 푸른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유정과 민혁의 사랑. 그 짙은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같단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는 목숨도 포기할 만큼 빠져는 깊은 물같은 것이다 - 그림처럼 아름다운 결말일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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