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기본은 감각과 경험의 재현이라고 합니다. 슬프고 힘든 일을 많이 겪어본 배우일수록 연기에 깊이가 있고 격하고 뜨거운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연인만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고 하죠. 물론 모든 배우가 이런 감정을 다 받아들이고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또 같은 일을 경험해도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덕분에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드라마에 따라 사랑 연기가 달라지고 시청자들이 그 다양한 모습을 즐길 수 있는 거겠죠.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 나라 드라마는 저자본으로 제작 가능한 멜로물에 집중한 경향이 있어서 배우들의 연기 수준도 높고 표현력도 뛰어난 편입니다.
다만 TV의 특성상 드라마 배우들의 연기가 과장되어 있고 감정 표현이 격한 편인데 소위 '막장'으로 평가되는 아침 드라마를 보면 그 특징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다른 일에 집중하던 사람들도 금방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소리지르고 울고 떠드는 내용이 많죠. 덕분에 인정옥 작가의 '아일랜드(2004)'같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이나영의 연기가 무덤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TV 드라마는 선명하고 눈에 확 들어오는 표현력이 유리 때문이죠.
이연희라는 표현력 등 여러 면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던 드라마 배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스크와 신체조건만 보자면 '미스코리아' 진 후보에 딱 어울리는 큰 신장과 예쁜 얼굴로 다른 배우와 차별화된 좋은 조건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이연희가 표현하는 캐릭터는 잘 하는 연기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미스코리아'의 오지영은 그동안의 이연희를 확실히 잊게 만들어줄 만큼 개성있고 잘 어울리는 역할 이었습니다. 연기자 본인이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을 잘 알고 있고 본인이 연기를 즐긴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더군요.
'미스코리아'는 이연희의 연기자 생활을 확 바꿔줄 터닝포인트임에 틀림없습니다. 과거 컴퓨터 미인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발음과 연기 문제로 지적받던 황신혜가 '똠방각하(1990)'에서 보여준 마담 캐릭터처럼 이연희도 '오지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죠. 당시 고급스럽고 화려한 역만 맡던 황신혜는 '똠방각하'의 미스 류 역할로, 싼티나는 마담 역으로 자신의 한계를 넓힙니다. 그 역할이 황신혜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놓았음을 물론 연기자로 살아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CCTV를 피해 몰래 삶은 계란을 먹고 직장상사에게 괴롭힘 당했는데도 '와이키키'하며 웃는 오지영. 동네 남학생들을 다 홀리는 천진한 미소와 풍선껌을 불며 애교를 떠는 모습이 이전까지의 이연희와는 확실히 달랐죠. '유령(2012)'에 출연할 때처럼 예쁘게만 보이려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마구 망가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먹는 것도 거리낌없이 먹는 오지영. 분명히 '미스코리아'는 앞으로 이연희에게 다양한 캐릭터가 가능하다는 증거를 보여준 드라마 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제 김형준(이선균)과의 키스신은 이연희가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시받는게 싫어서 미스코리아가 되기로 마음먹은 엘리베이터걸 오지영과 자신의 재능을 모두 쏟아부은 화장품 회사를 외국계투자회사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 김형준. 형준은 지영을 지켜주는 동시에 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비비화장품을 살리려 이윤(이기우)과 오지영을 걸고 약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미스코리아 대회가 끝나면 오지영을 포기해야한다는 안타까움에 정선생(이성민)에게 돈을 빌려 오지영을 돌보고 있었죠.
일주일 동안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분 일초가 소중한 김형준. 오지영이 웃어줄 땐 좋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지영을 보내줘야한다는 안타까움에 순간순간 무너지는 표정. 두 사람을 둘러싼 위기는 그게 끝이 아닙니다. 김재희(고성희)의 아버지가 서울 후보들을 입상 못하게 손을 쓴데다 이윤은 비비화장품이 물건을 생산할 수 없도록 작업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둘러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중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오지영 입니다. 미스코리아도 2부에 갈테고 사랑도 2부에 가겠다며 당차게 고백하죠.
못난 남자 김형준이 '오빠를 안 놔주겠다'는 오지영의 말, '하다 말았더니 여지껏 마냥 삼류고 아주 밑바닥이'라는 오지영의 말에 키스하는 그 장면. 마냥 철부지 어린아이들처럼 가벼운 키스만 나누던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졌음을 표현하는 장면이고 아픔이 느껴지는 애절하고 애틋한 키스신이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마음도 울컥할 정도 였습니다. 이 키스신은 IMF로 모든 걸 팔아치우는 드라마 속 청춘들의 상처인 동시에 우리 시대의 시청자들이 포기해야했던 사랑을 떠올리게하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슬퍼보이면서 진지한 김형준의 표정이 돋보이더군요.
이연희의 드라마를 본 것도 몇편되지 않지만 사실 키스신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이연희가 멜로를 찍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대사가 짧아도 능숙한 이선균에 비해 어색하달까 서툴다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띠동갑이 넘는 두 배우의 나이차이가 처음으로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이선균의 리드 덕분인지 전체적으로는 코끝이 찡할 만큼 안타깝고 아름다웠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라 드라마 흐름상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구요.
가만히 보면 이연희의 오지영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은 상대역인 이선균이 이연희를 잘 받쳐주는 덕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드라마 속 캐릭터 하나하나가 모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타령하는 깡패 정선생도 그런 정선생의 장점을 알아주는 고화정(송선미)도 돈자랑 하면서 첫사랑은 갖고 싶은 이윤도 미스코리아에 대한 자부심에 인생을 거는 마애리(이미숙)도 아버지 때문에 받은 상처를 독한 얼굴에 숨기면서도 인간적인 김재희도. 이렇게 개연성있는 캐릭터를 골라내는 것도 연기자의 기본 자질 중 하나 가 아닐까요.
드라마 '미스코리아'를 이야기하면 몇분은 시청률 이야기부터 꺼내는데 사실 드라마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시청률은 그닥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본방사수해도 시청률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것을 다운로드 받아 언제든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죠. 시청률이 낮았어도 기억하는 드라마들이 있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느냐 보다 중요한 건 얼마 만큼 잘 만들어졌느냐와 얼마나 매력있는 캐릭터가 만들어지느냐 입니다. 시청률에서 참패를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이연희가 캐릭터와 멜로연기에 대한 확실한 기본기를 닦고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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