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방송되는 일일드라마나 아침드라마를 보면 별의별 희한한 관계가 등장합니다. 얼마전 종영된 '루비반지'는 여동생이 언니의 약혼자를 차지하기 위해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는 내용이었고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했더니 전남편의 불륜녀가 동서더라는 내용의 드라마도 있었습니다. 주말극이지만 '천번의 입맞춤'은 어릴 때 헤어진 엄마가 여동생의 시어머니가 되고 여동생의 남편이 지금 사귀는 남자의 사촌형이라는 복잡한 내용의 드라마도 있었습니다. 겹사돈은 기본이고 한 집 며느리들이 재혼해서 다른 집안에서도 동서 사이가 된다는 내용도 있었죠.
드라마에는 불쌍한 주인공도 자주 등장합니다. '빛나는 로맨스'에는 시어머니에게 구박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며느리가 등장하고 '애정만만세'처럼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해 혼자 고생고생하며 사업을 일으키는 주부도 있습니다. 각종 영웅사극에는 고아로 태어나 노예가 되고 가족과 친구들이 다 죽는 불행한 주인공도 등장하죠. 시청자들은 한두가지 설정 때문에 가끔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설정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금방 잊어버리고 말죠.
'따뜻한 말 한마디'의 송민수(박서준)도 꽤 비현실적인 캐릭터입니다. 불륜으로 태어나 돌볼 사람이 없던 민수는 이복 누나 송미경(김지수)과 매형 유재학(지진희)이 부모나 다름없습니다. 사돈댁에 얹혀살며 눈치밥 먹는다는 상황도 독특하지만 태어난 자체가 누나에게 고통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복 누나에 대한 의리가 비정상적일 만큼 강하죠. 그리고 어제 방송분에서 송민수에게 벌어진 일도 흔한 일은 아닙니다. 유일하게 사랑하게 된 여자가 매형의 불륜녀와 가족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 이죠.
그런데 송민수의 눈물은 묘하게 현실적입니다. 불륜을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불륜의 상처를 느껴본적이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불륜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륜의 고통을 보거나 겪어본 기억이 한번쯤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할 내 가정이 남녀의 욕망으로 망가지는 모습. 송민수는 불륜으로 벌어진 상처를 모두 떠안고 있다는 점에서 자꾸 눈에 밟힙니다. 싸우는 엄마아빠를 보며 울던 아이의 기억 - 송민수는 불륜으로 갈등하는 부모를 보며 방황하는 아이같아 울컥하게 됩니다.
송민수는 불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 미경의 어머니가 싸우는 동안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똑똑히 보았고 상처받은 누나에게 빚진 기분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내 주제에 원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반쯤 포기하는 태도로 세상을 대했고 망고처트니 여사(박정수)가 까탈스럽게 누나를 잡을 때도 씁쓸하지만 묵묵히 누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발 뒤로 물러선 태도로, 위축된 생각으로 세상을 관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송민수에게 불륜은 세상 모든 가족의 행복을 깨는 범죄일 뿐 입니다. 누나가 재학의 불륜으로 고통받는 것을 알게 되자 누나의 가정을 은진이 깼다는 생각에 '휴먼매직체'로 타이핑한 협박편지를 보낸 것은 불륜에 대한 민수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민수가 불륜으로 태어난 자신의 존재에 컴플렉스를 느끼고 군대 선임의 대포차를 빌려 남몰래 은진(한혜진), 성수(이상우)를 쫓다가 우발적으로 사고를 낸 것도 어떻게 보면 무의식적이지만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불륜의 증거이자 상처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나은진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정체불명의 존재, 송민수 때문에 가족이 다칠까 불안해했고 쿠킹클래스의 미경이 재학의 아내라는 걸 알게 되자 성수에게 모든 걸 털어놓습니다. 민수는 불륜녀를 벌준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민수의 분노는 또다른 가정의 붕괴를 가져온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나은영(한그루)의 가족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부딪힌 나은진. 민수 역시 타인을 괴롭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됩니다. 교통사고만 아니었어도 지금 보다 떳떳할텐데 한때 은진의 가족을 죽일 뻔했던 사람이 어떻게 은영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의 캐릭터는 가족 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두 부부의 관계가 오락가락하며 회복의 기미를 보였던 것도 과거 두 부부가 서로를 사랑했던 기억과 부부로 인해 상처받는 가족에 대한 사랑 덕분이었죠. 반면 일찍 독립한 나은영은 언니 가족의 문제나 엄마 아빠의 곤란도 모르고 자신의 사랑이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 하는 캐릭터입니다. 사랑할 때 가족과 도리를 먼저 생각하는 송민수가 옳은건지 사랑 밖에 모른다는 은영의 이기적인(?) 사랑이 옳은 건지 선뜻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많은 부분 대조적이죠.
호수에 던진 돌이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나가는 것처럼 불륜의 상처 역시 그렇다는 점은 두말이 필요 없습니다. 은진과 재학이 그나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건너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 정도까지 복잡한 사이였다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회가 거듭할 수록 등장인물 중 가장 얄미웠던 망고처트니 여사가 불륜의 본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점 인데요. 은진과 재학이 부부 사이의 문제를 불륜으로 감당하는 동안 망고처트니 여사는 먹는 재미를 누리며 아들을 지켰습니다. 지금은 아들의 불륜으로 그 평화가 깨졌다는 걸 답답해하죠.
드라마니까 두 가족이 무리없이 봉합될 수도 있지만 민수와 은영이 선택은 어느 쪽이든 타격이 큽니다. 네 사람 중 가장 덤덤해 보였던 유재학도 아들같은 민수의 고통에는 끝끝내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민수커플도 두 부부의 이혼 문제도 합리적인 선택 따윈 없을 거에요. 결국 모두의 행복을 위해 망고처트니 여사처럼 자신의 상처를 떠안고 모른체하며 사는 부부가 될 것이냐 아니면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파국을 맞을 것이냐. 그도 아니면 새로운 사랑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냐. 뭐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이 드라마의 핵심은 '공감'에 있으니까 모두 이해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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