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려면 일단 드라마 속 세계에 빠져드는 게 중요합니다. 이 말은 바꿔말하면 드라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핵심 포인트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따뜻한 말 한마디'의 공감 포인트는 '불륜'이 일어난 후 부부가 겪을 수 있는 감정과 갈등입니다. 시청자는 불륜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땐 배우자와 상간녀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바람피우면 이혼해야지'하는 단호한 감정으로 보다가 차츰 두 부부 사이에 불륜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처와 진심을 보면 바람피운 입장도 이해가 간다 싶습니다. 마지막에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를 사랑반 미움반으로 대할 수 밖에 없는 주변 사정이 묘사되면 시청자는 드라마 속 부부에게 '왜 이혼하지 않냐'고 재촉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회를 보고 나니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따말'에서 보여준 해피엔딩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더욱 그런가 봅니다. 드라마 속 캐릭터에 감정이 이입되어 그들의 사건을 따라갈 때는 상대방이 용서되는 그런 기분이 들 수 있겠구나 하는데 마지막회를 보고 나니 (비록 관계는 가지지 않았지만) 평범한 부부라면 불륜으로 넘어진 배우자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특히 서로의 불륜으로 끔찍한 꼴을 봤던 김성수(이상우), 나은진(한혜진) 부부의 행복은 어떤 면에서 낯설기도 합니다.
아마 마지막회에서 느낀 이 괴리감은 현실에서 보았던 모습과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부부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이 불만족스러웠다거나 부부가 함께 하는 이유가 공감가지 않았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불륜녀의 여동생을 남동생의 아내로 들인다는 건 비현실적인 일이고 송민수(박서준)와 나은영(한그루)이 결혼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세 커플의 재결합이 해피엔딩이 되려면 한가지 조건이 더 필요 하죠. 아마 그 부분이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성으로는 이해가지 않지만 가슴으로 이해되는 이상한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송민수가 은진 부부의 뺑소니 사고 범인임을 아는 은영은 은진을 찾아갑니다. 자신의 사랑을 깬 언니가 밉지만 그 비밀을 아는 건 은진 뿐이라 털어놓을 곳이 없습니다. 그 장면을 보니 본처와 첩 사이인데도 형님, 아우하며 산다는 할머니들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워낙 바람기있는 남편이라 낯선 여자가 왔을 때도 놀라지 않았고 바람피러 떠난 남편 대신 어영부영 남편의 첩인 그 여자와 살게 되었는데 남편에 대한 미움을 털어놓을 사람이 그 여자 뿐이더란 이야기. 결국 그 본처 할머니는 그렇게 증오하던 남편의 불륜을 받아들이고 살게 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이에서 애인의 바람은 관계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부부는 '불륜'이란 폭탄이 떨어져도 때로 멀쩡한 척 살아가기도 합니다. '따말'에 등장하는 은진의 학교 선배 영경(김혜나)이 남편의 불륜 때문에 증오와 심술을 가득 담은채 쿠킹클래스에 다니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보던 불륜의 뒷이야기입니다. 뒤에서는 몰래 내연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던 여자가 자식들이나 남들 앞에서는 평범한 가정인 척 행복하게 산다는게 참 대단해 보이지만 속이 문드러진 영경의 선택이 해피엔딩이라기엔 너무나 기분이 찜찜하죠.
그러나 어린 딸의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은진 부부, 유재학(지진희)와 새로운 사랑법을 찾은 송미경(김지수)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불륜이라는 충격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쁨을 터득 했습니다. 불륜이 아니라도 어떤 식으로든 폭발했을 두 부부의 위기는 새롭게 태어난 '사랑'이란 감정으로 봉합되었고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물질이나 형식적인 의무가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있음도 알게 되었죠. 부부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해피엔딩이란 점에선 좋은데 사실 그들의 해피엔딩엔 '타인'이 빠져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통 부부 사이에는 이성 만으론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연결된 부부들은 배우자가 때려죽일 듯 밉다가도 다음 날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서로 남아 있던 사이였으니까 애증이 교차할 수 밖에요. 그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생각한다면 서로를 다시 사랑하게 된 두 부부가 다시 행복해진다는게 이상할 것 없겠죠. 그러나 대부분의 부부들이 불륜 앞에서 이혼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속으로 곪아가는 것은 타인의 시선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은진은 불륜의 '가해자'라는 이유로 손가락질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영경의 은진에 대한 분노와 대학 동창들의 성적인 조롱은 불륜녀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송민수가 누나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어설픈 정의감에 은진에게 협박편지를 썼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정도는 당해도 싸다'고 했습니다. 남의 가정을 깬 X이 그 정도 고통을 느끼는 거야 당연한거고 망신을 당하는 모습이 통쾌하다 고 했습니다. 불륜의 '피해자'에게도 비슷한 일은 일어납니다. 당사자가 이혼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사람들은 이혼을 종용하기도 하고 내연녀를 괴롭히는 일이 오히려 스스로를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실 제가 '따말'을 보고 내린 결론은 부부와 가족 사이에 솔직하고 따뜻한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부부 사이의 일은 제3자가 아는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불륜'을 미국 드라마 속 커플들처럼 쿨하게 해결하든 '사랑과 전쟁'의 한장면처럼 지지고 볶고 싸우든 부부 사이의 일은 남이 개입할 주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실제 사례 속에서도 한 가정을 깨트리는 것이 불륜인지 아니면 부부 사이의 문제를 큰 전쟁으로 만들어버린 탓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강요와 체면 때문에 그냥 살거나 이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혼을 하든 그냥 살든 당사자들의 결정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마지막회를 보기전 수년전 이혼했던 한 여배우의 컴백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여배우의 이혼이야 말로 혼자만의 잘못으로 정의내리기 힘든 케이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불륜녀'였다는 언론 기사 때문에 굉장한 비난을 받고 있더군요. 그녀의 사생활이 대서특필되었다는 점도 싫지만 부부 사이의 문제를 남이 쉽게 판단하고 말하는 문화가 오히려 가정을 깨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부 사이의 불륜이 혹시라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으려면 솔직한 대화와 사랑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말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을 지켜줄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이혼을 하더라도 개운하게 그냥 살더라도 앙금없이 - 그게 절대로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충분히 의미있는 드라마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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