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유럽에선 왕족이나 귀족이 엄청난 죄를 저질러도 사형을 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려 600여명의 여성을 살해한 엘리자베스 바토리가 사형당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머지 삶을 살았던 이유도 그녀가 왕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귀족 사회는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드라마 '정도전'은 고려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최영(서인석)의 최대 약점을 모자란 인성이 아닌 뼈속 깊이 고려 귀족이란 점으로 설정 합니다. 귀족 가문 출신답지 않게 몸소 왜구를 치고 오랑캐를 물리쳤지만 그에게는 고려 왕족과 귀족사회를 존중하는 뿌리깊은 근성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영은 왕실의 간곡한 청으로 이인임(박영규)을 살려둘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쿠데타는 여러모로 현대인들의 좋은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80년대에는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마마(1983)'와 '개국(1983)'에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을 다루기도 했는데 '추동궁마마'는 원경왕후 민씨를 뜻하는 말로 태종 이방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개국'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두 드라마는 모두 공통적으로 이성계의 건국 과정을 통해 당시 군부정권을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덕분에 고려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신씨인 것으로 묘사되지요.
30년 세월이 흘러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은 이성계나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이 되었습니다. 바뀐 시대 만큼이나 역사속 인물들에 대한 해석도 참신해졌습니다. 드라마 속 이성계(유동근)는 변방 출신으로 무장 최영에게는 인정받지만 고려 귀족들에게 배척받습니다. 견미(정호근)는 목이 잘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이성계를 '촌뜨기'라며 조롱 합니다. 군주인 우왕(박진우)와 대비 안씨(김민주)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최영은 이인임을 살려주자는 말로 이성계와 반목합니다. 최영은 결정적인 순간에 고려 귀족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정도전'의 이성계와 '개국'의 이성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둘 모두 역사적 사실 속에서 탄생한 캐릭터임에는 변함이 없고 같은 사서로 만들어진 캐릭터 입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경처와 향처를 따로 두고 이인임, 지윤(드라마 속 방형주)과 혼사를 맺는 이성계의 행동은 개경에 올라와 개경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흔한 권력지향형 호족들과 별다를 바 없습니다. 이성계가 경처 신덕왕후를 굉장히 아꼈다는 것으로 봐서 막내딸 경순공주의 혼사를 쉽게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 속 이성계는 기회가 오자 이인임을 단박에 공격해버립니다.
사실 추포되는 순간 각혈하며 최영을 속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인임과 우왕좌왕하는 우왕은 작가가 덧붙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즉 유배를 가기전 이성계와 최영에게 반격하는 이인임은 이성계와 최영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한 극적 장치 라는 이야기죠.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서 우리는 곧 이성계가 최영을 곧 배신(?)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성계라는 영웅이 영웅 최영을 배신하려면 타당한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인임에 대한 처벌이란 뜻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이성계가 최영을 제거한 이유 역시 뜻이 달라서라고 보는 쪽이 맞습니다.
생각해보면 변방 출신 이성계가 권력을 쫓아 이리저리 고개숙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서도 영 폼이 나진 않을 것같긴 합니다. 적어도 오백년 역사의 한 나라를 세운 영웅이라면 계획적으로 이인임과 최영을 선택했을 것이란 가정이 올바른 해석이겠지요.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은 있으나 지략은 없는, 사투리쓰는 이성계는 분명히 군부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했던 과거의 묘사와는 많이 달라졌 습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합격점이 아닐까 싶군요. 또한 최영과 이성계가 이인임의 처분을 두고 영원히 갈라졌다 - 픽션이고 드라마틱하지만 두 영웅의 체면을 모두 살려준 이 설정도 탁월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끝끝내 최영과 이성계를 갈라놓은 이인임
이인임은 이성계의 사돈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간신열전에 실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정도전, 이성계, 이인임의 역학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외세가 침략하고 왕이 반쯤 미쳐서 날뛰던 고려말 혼란을 돌아보면 이인임의 능력도 상당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실제로도 이인임이 몰락과 함께 고려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문신이 아니었던 최영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죠. 어찌 보면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왕족의 힘으론 다스릴 수 없는 장수들과 권문세족들을 이인임이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대가로 권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우왕은 여색을 탐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미치광이지만 묘한 생존본능을 보입니다. 병으로 물러난 이인임을 대신해 임견미와 염흥방(김민상)이 도방의 최고 자리에 앉았지만 영 탐탁치 않습니다. 도저히 국고를 채워주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같지 않자 최영에게 달라붙습니다. 왕위에 즉위할 때 자신을 겁먹게 한 장수지만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영과 함께 핵심권력이 된 이성계는 이인임의 표현대로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들인' 격 입니다. 우왕이 감당할 수 없는 장수입니다.
'정도전'의 이인임은 분명히 간신입니다. 고려의 운명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기존의 묘사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성계와 최영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려지며 하륜(이광기)를 통해 끝까지 이성계를 물고 늘어지고 정도전을 도모할 인물이 된다는 점이죠. 역사적으로 자신이 당했던 만큼 주인공들에게 돌려주는 인물인 셈입니다. 원래는 하륜이 이방원에게 정도전을 소개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드라마 속에서는 이방원(안재모)이 이인임 옆에서 하륜을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었더군요.
정도전의 말대로 오백년묵은 괴물이 된 고려를 혼자의 힘으로 바꾸기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인임은 그런 면에서 혼탁한 고려말에 가장 어울리는 현실적인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괴물의 뼈대이기 때문이죠. 그 유명한 이조년의 후예였던 이인임은 고려의 혼란을 개선하지는 못해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데는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극중에서도 최영, 이성계, 정도전이 가장 먼저 무너트려야할 대상이 되었고 끝끝내 최영과 이성계를 갈라놓습니다. 이인임이야 말로 정도전의 가장 큰 적, 개혁가들의 발목을 잡는 현실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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