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2014년 대한민국 드라마의 키워드는 '불신'

Shain 2014. 5. 8. 12:28
728x90
반응형
세월호 침몰 23일째. 많은 TV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정상화했고 TV 속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들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난 것같지 않은 평범한 5월이지만 진도 팽목항에서는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여전히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한때는 뉴스외 프로그램을 보는 것 조차 미안할 정도로 슬펐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도 울분도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도 화장한 친구의 발인에 참석했다는 한 고등학생의 글을 읽고 갑자기 마음이 아팠던 것처럼 이 일은 꽤 오랫동안 대한 민국 사람들에게 상처로 남아있을 것같습니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부터 구조과정까지 대한민국은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의 연속이었죠.

존경받는 재계인사가 살인범에 경제사범이다? 드라마에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래된 불신.




어쨌든 저도 오늘은 드라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푸념이기도 합니다. 생활비가 여가비의 비중 보다 훨씬 높은 대중들에게 가장 만만하고 가까운 오락 수단인 TV. 그중에서도 드라마는 현실과 닮은, 때로는 현실에서 전혀 동떨어진 환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립니다. 현대 사회는 솔직한 감정 표현을 죄악시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를 빌어 희노애락을 표현합니다. 드라마는 대부분 비현실적인 컨텐츠이지만 시청자의 정서에 민감하다는 면에서는 놀랍도록 현실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로 사람들이 정부와 언론을 불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면 권력과 언론에 대한 불신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권력 비리와 언론의 왜곡에 익숙해지다가는 언젠가 대형참사가 일어나고야 말 것이란 불안함을 이야기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된 것 뿐입니다. 사람들이 즐기는 컨텐츠인 드라마에도 그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014년 상반기에 방송된 드라마 대부분은 장르와 방송시기, 제작자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불신'이란 키워드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을 함부로 휘두르는 돈과 권력. 우리들이 보는 대한민국이 고스란히 드라마에 반영된다.


드라마 캐릭터 중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은 소탈하고 강직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모두 비리와 부정부패의 핵심이고 자신의 권력과 돈을 이용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의 축입니다. 이는 제작자들의 의도적인 왜곡이기 보다는 무의식중에 사람들이 권력과 비리를 한몸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생겼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심술같은 개인적 악행은 악해봤자 얼마나 악하겠습니까만 권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한 부정은 쉽게 막을 수도 없고 감당하기도 힘듭니다.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이 거대 권력의 횡포에 짓밟히지만 쉽게 이길 수 없다는 부분에 시청자들은 공감하고 있습니다.

'신의 선물'은 유괴당한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되자 아이를 죽인 범인을 찾는 내용의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범인 한 사람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홉살 어린아이의 납치에는 법무부 장관부터 경찰, 대통령 경호원, 재벌, 연예인까지 권력자들의 조직적인 은폐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 '빅맨', '골든크로스', '쓰리데이즈'는 돈의 권력 에 휘둘리는 한 개인의 인생을 주된 내용입니다. '골든크로스' 경우엔 한 평범한 가정이 은행 매매에 연루되어 박살나는 과정이 묘사되었고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이란 권력 조차 암살할 수 있는 재벌이 등장하죠. '닥터 이방인'은 정치적 음모에 희생된 한 의사 부자가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런가하면 MBC에서 방송중인 '개과천선'은 돈되는 일이라면 성폭행이든 일제강점기 피해자 보상 문제든 아무 사건에나 끼어드는 거대 로펌 이야길 다루고 있습니다. 자식의 죽을 죄를 돈으로 무마시키려는 재벌은 법무부 장관 후보까지 사퇴시키는 엄청난 인물이고 로펌의 사장과 변호사는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않습니다. 어제 첫방송된 '너희들이 포위됐다' 역시 비리 정치인과 경찰에 대한 이야기를 갈등의 한 축으로 엮고 있죠. 정치, 경제, 법조계, 경찰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속 '악당'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 재미있다면 재미있는게 사람들이 '음모론'으로 일축하는 드라마 속 사건들 중에는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또 아무 생각없는 일부 정부 인사들은 드라마 속 묘사가 과장되었다며 지적하고 나서겠지만 드라마가 아무 근거없이 공권력을 그렇게 묘사하는게 아니라 시청자와 제작자들이 본 한국사회가 그런 불신이 만연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인 것입니다. 못 믿을 일을 해놓고 못믿는다며 탓을 하고 불신을 막기 위해서 증거를 조작하고 지워버리는게 '그들'이란 막연한 인식이 있다는 이야기죠. 처음에는 막연한 의심이 나중에는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까지 쉽게 희생시키는 권력. 그냥 불신하는게 아니라 못 믿을 일을 했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초기 세월호를 버리고 탈출한 선장의 잘못만 전해듣고 선장을 비난한 국민들은 해경의 인명 구조대책이 전무하다는 것도 세월호가 비리많은 청해진 해운의 배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오죽하면 사고 소식을 듣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대국민 사과를 하러 나왔을 때 '선장이 죽일 놈이지 당신이 무슨 죄냐'고 측은한 마음을 드러낸 국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 발생 23일이 지난 지금은 세월호 '학살'에는 생각 보다 엄청난 사람들의 잘못과 비리가 엮여 있다는 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현실은 '음모' 따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없애지 못하는 부정부패를 드라마 속 영웅이 이겨내는 것을 보고 위안을 얻곤 하지만 사실 거대한 부정부패의 연결고리가 한 사람의 '영웅'으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인지 시스템에 자정능력은 있는 것인지 회의적이죠. '세월호 참사'는 안 그래도 쌓여있던 불신을 폭발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읽지 못하는 어린 아기들은 아직도 해경이 물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언니 오빠들을 살려줄 거라고 믿고 있다는데 신뢰는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쌓아지는 것이기에 더욱 이 상황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2014년 상반기 드라마 키워드는 '불신' 우리는 언젠가는 대형참사가 일어날 것이란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80년대 군사정권은 현실비판적인 드라마는 통제했지만 멜로 드라마와 치정극, 에로물에는 관대했습니다. 그때의 영향으로 한국 드라마는 돈 덜들고 시청률 잘 나오는 멜로에 치중하게 되었고 지금은 장르 드라마의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날카롭고 신랄한 풍자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드라마가 불신을 조장한게 아니라 드라마가 이렇듯 비현실적이지만 국민정서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4년 상반기 드라마의 키워드가 '불신'이었다는 점은 그만큼 대한 민국이 언젠가 사고가 일어날 것이란 불안함 속에서 살아왔다는 증거는 아닐지 거대한 불행은 막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728x90
반응형